그해 유월의 언덕에도 하얀 개망초는 흐드러지게 피었을까? 병사들이 숨었던 그 유월의 산 숲 속에서도 이른 봄꽃들이 남긴 풋 열매가 커가고 있었을 게다. 다시 유월의 그날이 왔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이번 6.25는 60주년이다. 한국전쟁으로 피멍들었던 가슴 때문에 일찍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아프다. 그때 초등하교 2학년이었으니 60년 세월 속을 참 무사하게 지냈던 것이 새삼스럽다. 60주년을 맞이하여 얘기로, 글로 들어오던 그 전쟁의 배경과 현상을 이제야 이해하는 부분도 많다. 직접 겪지 않았던 모든 숨겨진 이야기와 참상들을 영상물로 보게 되니 더 깊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 6월 24일, 부산 유엔군경묘지에서 한 장례식이 거행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 미군 병사의 무덤 앞이었다. 그의 아내는 결혼 6일만에 남편과 헤어졌고 그 남편은 전사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남편을 가슴에 안고 60년을 살았다. 그간 남편의 무덤에 참배하기 위하여 한국을 몇 번 왕래하기도 했다. 평소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남편의 무덤에 합장해주기를 바랐다. 그동안 남편의 유해를 미국으로 옮겨갈 생각도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남편의 무덤에 합장해 달라는 유지를 남겼던 터였다. 끝내 그녀는 한국전쟁 60주년이 된 이 유월에 주검이 되어 그의 남편 옆으로 돌아왔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남편의 전우들이 모여서 그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한국에 온 것이다.
미국, 영국, 호주, 터키 등 21개국에서 한국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그 초토화됐던 한국이 재생한 것을 보고 놀라고 기뻐하고 있다. 특히 터키란 나라는 형제애를 짙게 나누었던 나라다. 당시 터키 병사들은 한국 전쟁고아들의 대부였으며 의사이기도 했다. 그 때 창설한 앙카라고아원이 학원으로 발전하여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고, 그때 교육받은 아이가 한국의 큰 인물이 된 사람도 있다. 터키에서는 '칸카르데쉬'란 말이 있단다. 서로 피를 나눈 형제를 '칸카르데쉬'라고 부른다. 하여 한국과 터키는 칸카르데쉬라고 부른다.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들, 그 나라를 몰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 수 있었던 아름다운 나라의 젊은이들이 유엔군의 이름으로 2년 혹은 3년의 지독하고 무섭고 참혹했던 기억을 회상하며 한국의 팬으로 살아왔다. 어떤 영국 병사는 모험을 하기 위하여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참전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때 유럽은 2차세계대전이 막 마무리되었을 때였으며 세계는 좌우 이념으로 대립된 상태였다. 세계 강대국의 좌우 이념 대립이 한국전을 발발케 했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였으니 자칫 잘못하면 3차 대전으로 비약할 조짐도 배제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은 자기나라와 같은 이념을 가진 나라도 이웃처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끔찍한 전장에서 싸울 수 있었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지독한 전쟁 증후군을 평생 앓으면서 고향처럼 한국을 생각한다. 중공군도 자기들의 이념을 위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만과 중공으로 갈라졌다. 우리 국토는 세계의 보이지 않은 이념 전장의 희생물이다. 그리고 아직도 완전한 독립은 되지 않았으며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세계의 역사에 남아 있다.
전쟁의 참상에 직면했던 전 세대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시 아픔이 솟구친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많은 일들이 그때는 고통인 줄 실감하지 못하고 지냈다. 어머니가 되어서야 그때의 어머니들을 생각하곤 아이들 앞에서 그 날을 이야기하면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진주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오기 직전 아버지는 부산으로 전근이 되셔서 위기를 모면했다. 바로 부산에서 다시 개성으로 발령을 받게 될 줄이야! 9.28 수복 직후였다. 멋모른 나는 진주에서 부산까지 피난 와서 다시 어디로 피난을 갈 것인가 의아했다. 10월 1일 연합군의 의견을 무시한 채 국군은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게 되었다고 해서 국군의 날을 10월 1일로 정했다는 것의 의미를 이제야 알았다. 그 때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모두 데리고 모든 살림을 꾸려서 개성으로 이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시 중에 얼마나 무모한 행동이었나 싶다.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었으며 부모님과 언니들은 직접 그 후유증을 평생 앓았다. 얼마 후 다시 1.4 후퇴 때 맨손으로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 우여곡절의 애통함을 후에 나도 몇 편의 글로 남겼다. 두 달 여를 살았던 개성에서의 기억으로 언니들은 고향처럼 '야! 우리 개성 가자' 란 말을 자주 한다. 지난 금강산 사건으로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 더욱 가기 어렵게 되었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우리도 개성이 먼 이국에 둔 고향처럼 그러한데 직접 싸웠던 한국의 전장에 대한 젊은 병사들의 기억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다. 8,000 킬로 먼 거리에서도 말이다.
한국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모르면서 여름 복장을 입은 채 한국의 부산항에 도착하고 보니 겨울이었다지 않은가. 그 짧았던 기억이지만 긴 터널 같았던,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개성이 그리도 고향처럼 궁금하고 그립기까지 한 것처럼, 꽃다운 청춘을 보내기도 했던 그 참혹한 전장을 기억하는 노병들과 가족들도 그러하리라. 눈부신 청춘과 맞바꾸었던 한국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남편이 묻힌 곳이란 이유만으로 한국이 그리도 아름답게 생각되어 한국전을 공부한 호주 병사의 아내는 마침내 책 한 권을 펴냈다. 그 책은 그 남편의 이야기이면서 한국전의 기록이 되었다.
아버지의 빈자리, 남편을 그리워하며 보낸 세월, 자식의 생사도 모르며 살아온 어머니들의 세월. 주검도 찾지 못한 병사들의 소식이 메아리 되어 이 유월의 언덕에는 개망초들이 그리도 떼지어 병사들의 영혼인 듯 피고 지는 것인가. 폐허였던 비무장지대의 산하가 60여 년의 세월 동안에 지구상의 가장 목가적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이 살아가는 지역이 되었다. 수많은 지뢰 사이에서 30여 종류 이상의 포유동물에게 낙원이 된 비무장지대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비무장 지대의 낙원을 사이에 두고 분단된 남북. 전쟁의 기억 위에 세운 한국의 번영이 모래성이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처절한 기억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저 비무장 지대의 동식물처럼 우리에게도 평화를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신이여, 다시는 이런 일들을 겪지 않게 하십시오, 전쟁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잘못된 인류의 판단을 나무라시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채찍을 가해 주십시오. 미리 알려주었건만 하시면 우리가 너무도 우매하였다고 참회해야겠지요. 봄날의 꽃봉오리가 해를 거듭하여 잘 피도록 하시고 이 푸른 유월 숲 속의 어린 열매가 잘 크도록 끝까지 잘 지켜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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