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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고지연
ㆍ작성일	2010-07-12 (월)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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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만난 추억들
산책길에서 만난 추억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고지연

어둠이 태양을 끌어내릴 때쯤 우리는 집을 나섰다. 적당한 바람과 풀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6월 창포 꽃이 지기 시작하면서 한켠에는 노란 들꽃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꽃내음과 풀벌레 울음소리가 반가워 난 매일 남편과 삼천천을 거닌다. 18년 넘게 살아온 오랜 동반자지만 우린 무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 거리의 산책이 늘 짧게만 느껴진다.
인간은 과거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우린 종종 지나간 과거사를 들추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486세대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우리는 그만큼 여러 장르를 아울러 때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조금 늦게 출발한 우리의 산책길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효자다리에서 출발, 다리 밑을 지나 조그마한 음악벤치가 놓인 곳을 지나게 되었다. 늘 지나는 벤치에는 '7시 30분 작은 콘서트'란 이름이 씌어 있었고 그 옆엔 빨간 우체통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긴 하는 거야,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오늘은 악기들이 턱하니 놓여있지 않은가. 아직 연주자는 보이지 않았으나 콘서트가 열릴 모양이다. 가지런히 놓인 기타를 보면서 대학시절 취미로 했던 보컬이 생각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변변한 발표회 한 번 갖지 못했던 보컬이었지만 날마다 같은 연습에 목이 부어터지곤 했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우리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조금 더 걸으니 내가 좋아하는 오솔길이 나왔다. 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면 제법 널따란 꽃밭으로 이어진다. 그곳을 지날 때면 늘 지난날 홋카이도에서의 후라노언덕을 생각하곤 한다. 드넓은 언덕에 라벤다와 밀보리밭, 끝없이 펼쳐진 양귀비꽃까지······ . 남편의 일본유학 시절 우린 매년 후라노에서 여름휴가를 즐겼다. 귀국 후에도 삿포로에 갈 때면 늘 후라노의 보라색 라벤다숲과 비에이언덕을 찾곤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 앞 산책로에서 그 행복감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꽃 오솔길과 꽃밭을 찾아낸 것이다. 이 꽃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널따란 축구장이었다. 작년여름 천변에서 날아간 꽃씨들이 봄이 되면서 하나둘 초록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황토 운동장은 초록 풀밭으로 변했고 이내 노란 꽃봉오리로 변해갔다. 그러더니 이젠 그 꽃봉오리속이 답답했던지 노란 핏빛의 꽃잎을 펼치고 나와 연신 벌들을 유혹하고 있다.
남편은 지난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났던 소소한 일들을 들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반환점을 돌아 음악 벤치로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리더인 흰 머리의 남자분이 말문을 열었다. 음악회의 취지와 매주 일요일 저녁 7시 30분에 열리며 다함께 즐기는 작은 음악회이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빨간 우체통은 희망곡을 받는 곳이라 했다. 1980년대 음악다방에서 신청곡 쪽지를 DJ에게 전해주던 게 떠올랐다.
제법 어둠이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현란한 조명은 없었지만 천변을 가로지르는 차량의 불빛들로 음악회는 더욱 근사함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여름’, ‘모닥불’, ‘해변으로 가요’ 등 그 시절 즐겨 부르던 레퍼토리였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이 문득 지나간 시절이 떠올랐다. 역시 인간은 과거를 먹고 사는 것 같다. 순간 무더운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노래연습을 하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이름조차 가물거리는 리더였던 선배가 생각났다. 독특한 정신세계의 소유자였던 그는 악기만큼은 정말 신들린 것처럼 연주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과거를 생각해 내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다. 파이널 송으로는 폴모리아의 연주곡을 들려주었다.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노래도 좋았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해 준데 대한 감사의 박수였다.
인간은 저마다의 과거를 안고 산다. 그것이 아름답건 아름답지 않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 채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달디 단 곶감을 꼬챙이에서 하나씩 빼먹던 그 느낌으로, 나의 추억도 그렇게 하나씩 빼어 그 달콤한 맛을 영원토록 느끼고 싶다. 오늘 이 작은 음악회도 내일이면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또 다른 꼬챙이에 꿰어지겠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이 더없이 상쾌했다. 늘 행복하게 해 준 꽃길과 더불어 작은 음악회까지 한여름 밤의 산책은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2010.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