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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석인수
ㆍ작성일	2010-07-05 (월)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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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처 여고
근무처 여고
행촌수필문학회 석인수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5급 을류(지금의 9급) 공무원 공개경쟁 시험에 합격하여 1968년 9월 21일자로 임용 발령을 받았었다. 최초 임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사무소였다. 그 당시 토목직 공무원이 갈 수 있는 최 말단 기관이었다. 읍면동사무소는 조장행정기관으로서 정부조직의 발초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하는 일은 각자 분장사무가 있어 고유 업무를 추진하는 것 외에 종합행정체제라서 담당업무 말고도 현안 업무를 함께 처리해야 했다. 읍면장이 판단해서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으면 직원들을 총동원하여 그 일을 추진했다. 이른바 새떼몰이식 행정이다. 그러니까 직원들은 모든 업무처리에 있어서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의 계획과 의지대로 일하는 게 아니라 읍면장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방적이고 지시 일변도였다. 심하게 말하면 이유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런 속에서도 자기가 맡은 업무는 언제든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또 당면 업무 추진을 위한 각종 회의가 늦은 밤이건 새벽이건 시도 때도 없이 열렸다. 아주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출근하거나 밤늦게 야근하는 것을 밥 먹 듯했고 토요일 일요일 근무가 비일비재였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었다. 법으로 정해진 공무원의 출퇴근 시간은 그냥 말뿐이고 형식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런 규정이 있는 것이 마음속으로 거슬렸고 스트레스만 쌓이는 요인으로 작용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근이나 야근 수당 같은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은 시키는 대로 하고 월급은 주는 대로 받아야 했다. 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각종 명목으로 월급에서 떼어 가는 것은 어찌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말 그대로 쥐꼬리만한 월급이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정말 형편없었다. 날만 새면 종합행정 담당 마을로 출장 가는 게 근무의 거의 전부였다. 낮 동안에 사무실에 앉아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아주 급한 일이 있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드문 일이었다. 현지 출장 결과를 밤늦게 복명해야 하고 이른 아침에 출장 요령에 대한 지시를 듣고 출장 가는 게 일상이었다.
농촌에서는 겨우내 영농 교육을 받는 등 이듬해의 영농을 위한 각종 준비를 한다. 그러다가 해마다 입춘 무렵이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읍면 직원들의 일상도 농촌의 영농기에 맞춰진다. 볍씨 담그기부터 못자리 설치, 병충해 방제, 수확, 공판에 이르기까지 농민들과 함께 영농을 지도하며 한 해를 보낸다.
나는 1970년 5월 15일자로 당시 5급 을류에서 갑류로 승진했었다. 내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승진을 하였던 것이다. 공무원으로 신규임용 된지 1년 8개월만이었다.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담당 마을에 출장해서 논밭두렁을 타고 다니며 농민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저녁 무렵에 사무실에 돌아왔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총무계장이 나를 불렀다. 다가가니까 하는 말이 내가 승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임용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임용장을 받아 들고 내용을 보니까 승진된 날짜가 열흘이나 지난 뒤였다. 그 순간 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임용장의 수여나 교부는커녕 승진 날짜가 지난 뒤에 공문으로 임용장을 첨부하여 뒤늦게 승진 사실을 알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이미 열흘 전에 승진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 자신이 무능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근무처를 보니까 한글로 ‘근무처 여고’라고 쓰여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고 한숨을 돌린 다음 조용히 총무계장에게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내가 여고(女高)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나의 정황으로 보아 상당히 불만 섞인 볼멘 어투였을 것이다. 그랬더니 총무계장께서 가까이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흰 종이에다 대고 한자로 如古라고 쓰셨다. 나는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바로 의문이 풀렸다. 그러면서 여고라는 말은 한자로 같을 여, 옛 고로서 전과 같다는 뜻으로 여고(女高)로 가는 게 아니라 현재대로 읍사무소에 근무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정말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 당시 내 모습을 지켜보았던 몇 몇 직원들은 속으로 많이 웃었을 게 틀림없다. 무슨 이유로 여고(女高)로 가야 하느냐고 정색을 하면서 따지듯 물었던 내가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을 테니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곧바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1년간 쉬게 되었다. 그 사이에 동네 사랑방에 개설된 서당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한 적이 있다. 무작정 한자를 쓰고 외웠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는 서당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어설프지만 한시를 지어보기까지도 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국어시간에 선생님께서 일일이 칠판에 판서를 하셨다. 그런데 나는 한글 낱말 다음에 괄호로 한자만 써 넣으면 그 낱말의 뜻은 노트에 적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뜻풀이가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배운 한문공부 덕이었다. 그런 내가 공무원 초년병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무식(?)을 드러낸 셈이다. 한자(漢字)는 뜻글자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뜻이 내포되어 있어서 그 글자를 씀으로서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 우리말이나 글은 한문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따라서 한글과 한자를 같이 쓰지 아니하면 그 뜻이 얼른 와 닿지 않거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게 사실이다. 내가 범했던 무지의 경우도 비단 나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쉬운 예로 글 쓰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퇴고’라는 말을 보자. 한글로 퇴고라고만 쓰면 아마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한자로 推敲라고 써 놓아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자의 뜻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일종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이다. 또 ‘초고’라는 말을 보자. 한자로 草稿는 초벌로 쓴 최초의 원고라는 의미이고 礎稿는 퇴고를 하는 바탕이 되는 원고를 뜻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참으로 많다. 나는 우리 글의 흠결이나 맹점을 꼬집으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글만으로는 표현이 불충분하고 의사 전달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려운 한자어로 된 낱말을 우리말로 고치고 만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근무처 여고’는 ‘근무처 전과 같음’으로 ‘퇴고’는 ‘고치고 다듬음’정도로 하면 좋을 성싶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차원에서도 이와 같은 노력이 있어야 하고 쉽고 편리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나는 40년의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근무처 여고’라는 임용 발령을 여러 번 받았었다. 그 때마다 최초 승진 발령을 받았을 때가 떠올라 속으로 쓴 웃음을 짓곤 했었다. 공직 생활을 그만 둔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이 잊히지 않는다.
< 2010. 2.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