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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경숙
ㆍ작성일	2010-08-31 (화)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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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의 문턱에서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 야간반 박경숙

오래 전부터 동네 어귀에서 철따라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여름이면 옥수수와 수박을 팔고 가을이면 다른 과일과 군밤을 구어 팔다가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붕어빵을 굽기 시작한다. 가끔 중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딸아이가 번갈아 나와 어머니를 돕는다. 아버지는 뭐하실까. 혹시 없는 것은 아닐까? 지나다니다 무심할 수가 없어 가끔 물건을 사주곤 한다.

살아가는 모습이야 제 각각일 것이다. 아주머니를 돕는 딸아이들을 보면서 아직도 아이들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내 자신의 실체를 본다. 그나마 다소 독립적인 사고를 가진 딸아이와 별 탈 없이 자라주는 아들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작년 가을 이맘때였다. 전주 교동에 위치한 공예품전시관에서 몇몇 친구들과 도자기 작품전을 열게 되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과 동료, 그리고 도예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조촐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곳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대학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내던 남편 친구와 17년 동안 미국에서 살다가 프린스턴대학 입학을 앞두고 한국에 나온 친구의 딸이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만해도 작고 귀엽던 소녀가 어엿한 숙녀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꼼꼼히 전시관에 진열된 도자기를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미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느새 17년이라니, 화살처럼 빠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철없던 5살 박이 어린 아이와 그녀 어머니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을까. 남편 친구와 아내는 다감한 부부의 전형적인 모범 케이스였다. 연애만 8년을 하고 결혼하였으니 아이들의 사랑 또한 극진했다. 그러나 유행처럼 번지던 외국어 조기교육 열풍에 휘말린 20세기 대표적인 희생양이기도 하다. 평범한 중등교사였던 남편의 친구는 두 딸의 선진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오랫동안 기러기 아빠를 자청했다. 하지만 한쪽의 무리한 교육열로 부부의 의견이 갈리며 이혼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교육자의 봉급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한때 사랑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갈라서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한국 땅에 남아서 어머니의 고생을 나 몰라라 한다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그녀의 하소연을 조금 들어 주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께 안부를 전하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도자기 몇 점을 싸주었다.

그나마 남편 친구의 자녀는 아주 잘된 유형 중 하나다. 지금도 주변뿐 아니라 대한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올인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좋은 환경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가족 구성원의 합일점일 때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라면 모성애 운운하지 않더라도 자식 문제에 대해선 누구든지 민감한 건 사실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만큼은 가족 간의 애정과 안위, 아버지의 자리는 자연히 공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상위 1%의 대학 타이틀과 우수한 외국어 실력이 꼭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제와서 이런저런 한국역사와 교육환경을 아우르자면 그 또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50년도부터 전해내려 온 말 중에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단어가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소를 팔아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했다는 뜻으로 ‘대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그때는 너도 나도 힘들고 배고픈 시기였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에게만은 뼈아픈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자녀들 역시 비천한 아비의 고생을 몸소 보고 자라서인지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꿈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 날의 자녀들은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 부모의 희생은 자식을 위한 당연한 산물로 여기고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건 부모도 마찬가지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을 자랑으로 품고 산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궁핍을 알 리 없는 아이들도 시간적인 여유와 물질의 풍요로움조차 피부로 느끼지 못한 채 무감각하게 살아간다. 그저 모든 것을 당연한 수혜로 생각한다.

TV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며칠 전 다큐멘터리 하나를 보게 되었다. 형식은 인간극장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누구 씨, 힘내세요.’ 란 부제에 걸맞게 한 남자가 행인들을 부르며 전기구이 통닭을 팔고 있었다. 마음만큼 바쁘지 않은 손놀림과 간간히 절룩거리는 다리로 보아 정상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트럭 하나에 하루 2만 원도 안 되는 수입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은 늘상 싱글벙글 함박웃음을 짓는다. 호시절엔 부부가 함께 닭을 팔아 수입이 짭짭할 때도 있었다는데 그조차 조류파동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지 오래라고 한다. 그래선지 아내는 새벽 한 시부터 오전 열시에 끝나는 김밥말이 직장에 나가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한 쪽 다리가 짧게 태어난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린 딸과 딸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엄마, 그리고 늘 잠이 부족한 어머니를 위해 가사 일을 돕는 아들이 어쩌면 그의 전 재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동네 셋방 보금자리는 언제나 따스하게 보였다. 하루하루 힘든 생활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위하는 가족애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여섯 살 딸아이는 어린이 집에 가지 못해도 씩씩했고, 학원 문턱이 높아도 빨래를 너는 아들을 보면서 고난을 딛고 서로 돕고 아끼는 가족의 희망을 읽으며 내 자신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때때로 부와 명예, 충분한 시간을 가진 부유한 부모들만이 아이를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재로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건 부모의 경제적인 환경이 특별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기업인 워런 버핏은 3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사회에 기부했지만 뉴욕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자녀들 모두 아버지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고 한다. 평소 워낙 돈에 대해 철저하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가 부자라고 자기가 부자인 것은 아니며 돈은 일을 해서 벌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 폴 게티는 유전 개발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그는 사업 성공의 이유로 부모님의 가르침을 꼽았다. 그의 자서전 ‘내가 본 것들’(As I See It)에서 부모님에게 노동 윤리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평범한 아버지들을 위대한 인물의 아버지로 만들었을까. 그건 아마 자녀를 독립적인 사고로 키우는 어버이의 마음이 비범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훌륭하게 자녀를 키워낸 부모들의 공통점은 주위에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가치관과 자기만의 애정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부정할 수 없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떤 경우든 행복해야 되므로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더 많은 것을 해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주도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깊이 반성해 볼 문제다. 부모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자녀가 행복해 진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일지 모른다. 아이들 스스로 무엇이 자신의 모습인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본 뒤 성공과 실패를 경험함으로서 알아가게 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언제까지나 부부 위주로 살아라. 자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지 마라. 누가 뭐라든 이것이 요사이 우리 부부의 지론이다.

(2010. 0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