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이나 자식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다녀와서 취직과 결혼을 하면 독립해 나간다. 우리 부부도 그동안 36년을 살다보니 아이들이 다 떠나고 둘이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중년 후반이 되었고, 홀로가 아닌 것을 감사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식들과의 이별은 아쉽기도 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축복할 일이다. 그런데도 가끔 허전하고 쓸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자주 부부여행을 계획해 보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이번 여행은 아들의 결혼으로 신경을 많이 쓴 아내를 위해, 목적지를 보길도로 정했다. 최근에 노화도와 보길도 사이에 보길대교가 놓여, 한 번에 두 섬을 관광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자가용을 몰고 완도 화흥포항을 향해 오전 6시에 전주를 출발하였다. 운전은 여느 때처럼 내가 맡았다. 아내도 운전경력이 15년쯤 되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의 운전이 불안하다. 네비게이션을 달았지만, 복잡한 갈림길에선 해석이 달라 의견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너무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다보면 길치가 될 것 같아 걱정이다. 간혹 대화로 인하여 전방주시를 소흘히 한다고 퉁을 맞기도 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여행의 재미는 목적지에 있다지만, 국도주변 풍경을 구경하는 일이 더 즐겁고, 여행은 자유로워서 좋다.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멈추어 촬영도 하고, 배경이 좋으면 아내는 모델이 된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고, 예쁘지도 않다며, 싫어했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보다 젊은 날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라고. 여행을 하다 보니 아내 사진에 비해 내 사진은 거의 없다. 지금도 내가 부탁하지 않으면 아예 찍어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델노릇에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장 만만한 사람이 아내다. 만일 아내가 없다면 누가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인가? 둘이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한참을 달리다 말이 없어 흘낏 보면, 어느새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조수석 여자가 졸고 있으면 틀림없이 부부간이라는 개그(gag)를 증명하는 중이다. 그래도 깨어나면 창문도 여닫고, 간식을 권하며, 대화를 나누니 지루하지가 않다. 그래서 여행은 동반자가 필요한가 보다.
부부는 삶의 동반자이다.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 가슴이 확 트이는 가 했더니 어느새 화흥포항이다. 승용차를 배에 싣고 바다에 안긴 나는 마음이 설렌다. 어릴 적부터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멀고 가까운 섬들과 그림 같은 어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보니 노화도의 동천항이다. 반듯한 주택에서 어촌의 여유가 묻어나고, 청정 남해는 김, 미역, 전복 때문에 풍요로움이 넘쳐난다.
노화읍 소재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시키면서 돈의 씀씀이와 식성이 다른 우리 부부는 실랑이를 한다. 음식 값에 비해 맛과 친절도는 떨어졌다. 섬치고는 도로 사정이 좋아서 이곳저곳을 달려 보았다. 인구수에 비해 이름난 관광지가 없고, 일주도로가 완성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보길도다. 보길도는 10여 년간 윤선도의 은거지여서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곡수당, 낙서제, 동천석실 등 당시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 중 세연정은 대표적 유희 장소로 조선시대의 빼어난 정원양식을 엿볼 수 있다. 풍치가 여유롭고 멋졌다. 세상은 당시와 크게 달라졌지만, 이렇게 화려한 은둔생활은 꿈같은 일이다. 오히려 부럽기까지 했다. 나도 이런 별천지에서 모든 것 다 잊고 1년만이라도 은둔생활을 하고 싶다. 산 중턱의 동천석실을 둘이서만 오르려니 적막하고 음침하여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무난히 걸을 수 있는 건강한 신체에 감사하였다.
차를 타고 이곳저곳 마음 내키는 대로 달려 보았다. 연안의 양식장 때문에 탁 트이지는 않았지만,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부지런한 어민들에게 고마웠다. 섬에 살아도 건강하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바닷가 모텔에서 파도소리를 벗 삼아 잠들고 싶었으나 갑갑해서 싫다는 아내의 의견에 따라 완도를 거쳐 대흥사 주변에 잠자리를 정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것 같다. 다음날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대흥사를 샅샅이 돌아보고, 강진의 도자기 전시관에서 생활자기를 몇 점 구입한 뒤, 박물관을 거쳐 집으로 향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아내에게 운전을 맡긴 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둘이서 운전을 번갈아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와 설렘으로 여행은 시작되고, 끝나면 아쉬움과 피로가 솜처럼 밀려오지만 아련함과 즐거움도 남는다. 이번 여행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 36년을 부부로 살아왔어도 여전히 자잘한 다툼이 없지 않지만 개성 탓으로 돌리고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우리나라가 작다지만 여행을 다녀 보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국내 여행도 갈 곳이 많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나는 감사할 일이 도처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감사할 일이 많음은 왜일까? 단둘이 사는 쓸쓸함도 달래고, 여가도 즐기며 수필소재도 찾을 겸 자주 여행을 해야겠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낮추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일이다.
(2010.5.16.)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