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 그 아름다운 정신
대한민국 풍수명인 김상휘 박사
고귀한 집이다.
수 세월 동안 험한 역사가 스쳤는데도 불구하고, 집은 여전히 선비의 기품이 서려 있다.
부엌 한쪽 그늘 속 낡고 허름한 목독(木?), 쌀을 내던 작은 문패엔 아직도 타인능해<他人能解>훈문(訓問)이 잔잔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운조루 건축배치는 완벽함을 추구한 품(品)자 형태로 좌(座)를 틀고, 자연과 조우(遭遇)중에 있다.
집 주인 류이주(柳爾胄)는 정조 때 구만들(九萬坪)에 대규모 집을 짓고, 그 지명(地名)을 따자신의 호(號)를 귀만(歸晩)과 댁호(宅號) 귀만와(歸晩窩)를 얻었다. 운조루 란? ‘구름속 새와 같이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돌아 나오고’ 조권비이지환(鳥倦飛而知還)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오는구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싯구 첫 자로 당호(堂號)를 택했다.
운조루를 풍수론으로 보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다, 청룡(靑龍)·백호(白虎) 양 날개와 유장히 흐르고 있는 섬진강 입수가 풍수(風水) 명당도(明堂圖)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류이주는 낙안부사로 왔을 때부터 운조루 건축은 시작됐다. 그때가 1776년으로 양 아들 덕호에게 말하기를 ‘설계에서 한 치의 유격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주문했다. 그것은 마음속에 이미 운조루를 완벽하게 그려놓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운조루는 99칸짜리 집으로, 경상도 대구출신인 그는 활동무대가 전라도여서 전라도의 선(線)과 경상도의 높이(高)를 조합한 건축물로 탄생시켰다.
벼슬을 했던 선비들은 노년이 되면,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아름다운 귀향(歸鄕)을 꿈꾼다.
정치란, 무당의 작두날을 타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늙어지면 젊은 날에 걸쳤던 벼슬 옷을 벗어버리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붕우(朋友)들과 술잔을 나누고 싶어 한다.
류이주도 그렇게 여생을 즐기고 싶었지만, 정조는 충정심 강한 그를 쉽사리 놓아주질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낙안군수 재직시절, 낙안 세곡선이 한양으로 올라가다, 서해바다에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책임으로 함경도 삼수 땅으로 유배를 다녀오면서 류이주는 미뤄왔던 귀향을 결심하고 운조루를 다시 짓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조가 류이주를 재 호천(呼薦)하여, 용천부사에 임명하자, 운조루는 1782년 양 아들 덕호에 의해 더디게 완공됐다. 무인(武人)이었던 류이주는 남한산성 성곽 재 보수와 수원성·동헌건물·정원공사 경험이 쌓이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종합 예술가가 되어갔다. 그의 건축철학은 세움보다 자연과 어우러진 미학(美學)을 중시했다.
류이주는 수원성 복원공사 당시 총 감독을 맡게 된다. 정조는 완성된 수원성을 보고 대단히 흡족해 하자, 반대파 정객들은 정조에게 고(告)하기를 ‘성(城)의 축조(築造)는 모름지기 튼튼하게 쌓는 것이 원칙일진데... 예쁘게만 지어져 적의 침공이 두렵사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이에 답하기를 ‘아름다움은 능히 적도 물릴 칠 수가 있느니라’ 며 류이주의 미학적 건축정신을 칭찬했다.
류이주 건축물은 대부분 천지인풍수사상(天地人風水思想)에 바탕에 두고 있다. 운조루 대문 앞 아담한 연당(蓮堂)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에게 아름다운 시상(詩想)을 제공한다.
하지만 류이주는 남쪽 오봉산 화기(火氣) 날을 막고, 운조루 기운이 외지(外地)로 빠져나감을 방지하기 위한 비보(裨補) 책으로 만들어낸 의도적인 소류지였다.
풍수지리의 대표적인 이론은 형상(形象)과 형기(形氣)론이 있다. 눈에 보이는 형세(形勢)를 판단하는 것을 형상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自然)에너지를 풀어가는 것을 형기론이라 한다.
류이주의 풍수지리 내공 역시 대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집터를 다지면서 ‘하늘도 아꼈던 터를, 자신에게 비밀스럽게 내 준 터’ 라고 독백 한 점이다.
또한 운조루 바닥공사 때, 금구몰니(金龜沒泥) 혈 자리를 예견이라도 하듯, 호박만한 돌 거북이 출토되었다. 이를 두고 그는 아궁이자리 선택에 있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북은 불과 상극(相剋) 관계로 아궁이를 택하게 되면, 거북이는 말라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거북 돌이 출토자리에 아궁이가 아닌, 습(濕)이 있는 물 항아리 자리로 택하였다. 자연에너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내공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미동의 안산(案山)은 강 건너 오봉산이다. 형국으로 보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예(禮)를 갖추는 군왕봉조(君王奉祚)형상이며, 하늘의 다섯 별자리를 뜻하고 있다.
토지면은 금환락지(金環落地)형국이다. 지리산 노고단과 월령봉(月令峰) 용맥이 섬진강 물줄기와 함께 돌아 풍요로운 들판을 만들어 냈고, 오보교취(五寶交聚), 오봉귀소(五鳳歸巢) 혈(穴)자리를 합해 토지면의 3대 진혈(眞穴)로 본다.
오보교취(五寶交聚)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으로 부(富)를 상징하고, 오봉귀소(五鳳歸巢)는 큰 인물(人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이 내포된 혈 자리다.
류이주 풍수사상은 ‘땅이 명당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측은지심(惻隱至心) 수행(修行)을 통해 명당(明堂)을 만들어 낸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적덕정신(積德精神)을 실천에 두고, 후손들에게 근면, 성실, 노력, 분수에 맞는 생활과 운조루가 지켜야할 실천윤리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훈으로 삼았다.
류이주의 대표적 측은지심 수행은, 목독에서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염치(廉恥)를 보듬기 위해,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하도록, 뒤 안 그늘 깊은 곳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또한 월말이면 목독을 점검해 식량이 평소보다 많이 남아 있으면 ‘나눔을 핑계로 행여 그들에게 염치를 남기지나 않았는가?’라며 며느리에게 염려(念慮)를 나눴던 점이다.
그러한 운조루 정신은 혼란스러운 역사 즉, 동학과 여순 반란, 6·25사변을 거치면서 지리산자락 절간과 민가(民家)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있을 때, 운조루는 그러한 험한 난을 무사히 피해나갈 수가 있었다.
이를 두고 류응교시인(류이주8대손)은 10가지 운조루 정신을 에둘러 얘기했다. 첫째는 가난한 이웃과 함께했던 적선정신타인능해(積善精神他人能解)와 둘째는 누마루 수분실(隨分室) 현판처럼 분수에 맞는 생활태도, 셋째는 풍류정신(風流精神)으로 시인묵객들과 교류, 네 째는 인간존중정신(人間尊重精神)으로 여인들만을 위한 사랑채 공간, 다섯째는 기록정신(記錄精神)으로 3대에 걸친 농가일기·생활일기, 여섯째는 낙안군수 재직 시 청빈한 직무수행, 일곱째는 미학적건축정신(美學的建築精神)으로 수원성을 아름답게 축성한 점, 여덟 번째는 절개정신창씨개명반대(節槪精神創氏改名反對)조선선비로서 절개를 지킨 점, 아홉 번째는 부모조상효도정신(父母祖上孝道精神)으로 선조제사와 산소 돌보는 일, 열 번째는 겸애정신(兼愛精神)으로 굴뚝기단을 낮추게 한 점을 들었다.
누마루 난간 연꽃무늬는 주돈이의 애연설을 연상케 했다.
‘국화는 은일자, 모란은 부귀의 뜻이지만, 연꽃엔 그다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돈이가 연꽃이 만개하던 날 붓 들어 연꽃을 칭찬했다. 그로인해 연꽃은 ‘군자의 꽃’으로 애칭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운조루 누마루 난간 연꽃무늬는 선비의 고귀한 말년과 군자가 행해야 할 도덕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류이주가 상징적으로 새기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