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의 창건주로 알려진 류이주라는 인물이 오미동에 대저택을 조영하게 된 연유을 그의 행적에서부터 살펴보자. 『三水公行狀』에 의하면 그는 문화류씨로서 1726년(병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여러 무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관력에는 운조루의 창건과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한다. 하나는 창건시기에 즈음한 46세 때(1771) 군수로 역임한 낙안은 전라도 구례와 인접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오미동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였다고 볼 수 있고, 둘째는 남한산성과 함흥성의 축성과 공사의 활발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직접 대저택의 조영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본다.
다음 인맥관계에서 볼 때 형인 이혜(1721-1790)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류이주는 5살 위인 이혜를 몹시 존경하고 친밀과 지극한 우애 속에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류이혜는 당시 호남지오학으로 꼽히던 박광일의 학풍을 흠모했고, 이혜가 지은 오미동 팔송정에서 자주 교루하고 다녔다는 사실로 보아 유이주가 유이혜의 지리적 입지성을 파악하였으리라 본다. 류이주는 종제인 류이익과도 정분이 두터워 집안사를 거의 다 맡겼는가 하면 류이익의 차남인 덕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실제 운조루의 창건공사시 덕호에게 감독케한다든가 그의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준 분재기에서 이익과 이익의 아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등 함깨 이주해 와서 마을을 이룬 데에는 이들 형제와 조카들의 친밀한 결속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와 아울러 1770년대 운조루 창건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배경은 창건시기를 전후하여 다수의 토지매입과 노비소유를 통해 재산증식이 왕성하였던 점에서 파악될 수 있다. 특히 류씨 일족이 임시거처인 토지면 구룡정 마을에서 운조루가 완성되는 1776년에 오미동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는데는 선착민의 협조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실제 1775년 양아들 덕호를 구례의 토호였던 재령이씨 이시화의 딸과 결혼시키면서 이시화의 많은 토지들이 류씨의 소유로 이전되었고, 이때 현재의 운조루터를 양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류이주의 선조들은 본디 대구직할시 동구 입석동(당시는 대구 해○면 입석동) 지금의 대구비행장 가까이서 살았다. 문화류씨 곤산군파(崑山君派) 30대 영삼(榮三?1675∼1735)과 영천최씨(永川崔氏)사이에서 세아들중 둘째로 1726년에 태어난 그는 힘이 장사였다.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에 올라간 그는 당시 훈련도감 김성응(金聖應?1699∼1764)눈에 띄어 스물여덟살 나던해인 1753년(영조29)에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 31년(1755?2월), 홍봉한(洪鳳漢?1713∼1778?영의정)의 천거로 특채되었다. 그는 '새재'(鳳嶺)에서 호라이를 채찍으로 쳐 잡은 장사로 알려져 있었다. 마흔두살 나이에 1767년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한산성 쌓는 일에 동원된다.
그는 이듬해 전라도 병마우후가 되어 1771년(46살) 낙안군수가 되었다. 그는 금주령을 위반한 죄목으로 1773년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가족을 거느리고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왔다가 토지면 구룡정리(九龍井里)로 이사했다고 구전되고 있다. ≪조선실록≫의 기록에 다르면 그는 낙안군수 때 낙안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침몰한 책임 때문에 귀양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 말엽 사색당쟁에 휘말려 유배형을 당했던 것 같다. 류이주를 추천했던 홍봉환이 시파로 세손인 정조를 옹호하다가 벽파에 몰려 1771년 청주로 귀양을 갔다. 홍봉한의 천거로 출세한 류이주도 그 영향을 입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하던 1776년 다시 벼슬길에 오른 것은 홍봉환의 재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1776년 함흥 오위장(五衛將)으로 재등용되어 함흥성을 쌓는데 그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구례로 몸을 피해 살던 시절인 1775년 그의 조카인 덕호(德浩 1756∼1815)와 이곳 토호였던 이시화(李時華1725∼1784)의 딸과 성혼을 시켜 사돈간이 된다. 처음 그가 살던 '구룡정'은 오늘날 금환락지의 중심지라는 '용정'을 뜻한다. 그는 15년뒤인 1790년 삼수부사 재직때 조카인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구례 토지면의 토호였던 재령(載寧)이씨 이시화와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이씨의 땅이었던 지금의 '운조루'자리를 집터로 양여받는다. 1776년(丙申) 산자락에 자리잡아 사태의 위험이 있고 고인돌마저 널려 있어 이곳 사람들은 개간을 꺼리던 자리에 집을 짓기위해 땅을 파던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 길이 25센티미터, 높이 12센티미터, 머리 3.5센티미터의 이 돌은 집을 완성하고 1782년 함을 만들어 가보로 전해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 이 집은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6년만인 1782년 류이주가 용천(龍川)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집을 착공하자마자 정권이 바뀌면서 류이주는 바로 사면이 되어 정삼품인 오위장에 발탁되었다. 함흥에 부임한 뒤 이듬해 상주 영장을 거쳐 82년(57살) 평안북도 용천부사로 전직되어 근무하였으므로 집을 짓는 일은 그의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물론 설계는 류이주가 해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도록 엄명을 내렸다. 덕호는 류이주의 사촌인 류이익(柳爾翼1737∼1792)의 9남1녀중 차남으로 그의 아버지와 함께 종백주인 류이주를 따라와 구례에서 살다가 결혼도 하고 집짓는 감독을 맡은 뒤 뒷날 양자가 되어 재산을 물려 받았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고 기뻐했다. 류이주는 운조루 곁에 사촌동생인 류이익의 집뿐아니라 그의 맏형인 이혜(爾惠 1721∼1790)의 집도 지었다.
이 집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구례로 처음 옮겨왔을 때 노비는 5명이었으며 용천부사는 지내고 경상도중군으로있던 1786년 그 집 노비수효는 11명으로 늘었다. 풍천(豊川)부사를 지내던 시절인 1792년의 노비는 9명이었고 이듬해 재산상속문서는 21명으로 늘었다. 당시 재산은 집이 78칸, 밭이 2.5결(結), 논이 26결(結)이었다. <당시 전답 1결은 1등전일 때 11,035.5평으로 수확량에 따른 과세의 기준이다. >
오늘날 이 집안의 가대를 지키고 있는 유홍수(鴻洙39)씨가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15두락), 논이 11필지 1,772평이므로 전답이 조금 줄었다고 하겠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 딥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여러채가 연결되어 점(占)자 모방마당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雲鳥樓)라 한다. 후손들은 유이주를 '삼수공'이라 부른다.
이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이다.
도연명이 41살 나던해 평택 현령 벼슬을 살고 있었다. 부임 80일만에 때마침 군에서 행정시찰을 온다고 하자 현의 관리로 관복을 차려입고 나가 독우를 맞이할 처지가 한스러웠다. 도연명은 '나는 오두미(五斗米)의 녹을 위해 허리를 굽혀 시골 소인배들을 섬길수는 없다'고 선언,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에 돌아가면서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가고 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가>로 시작되는 귀거래혜사를 읊었다.
류이주는 이글 가운데서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雲無心以出岬 鳥倦飛而知還)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글자를 취해 그의 집 이름을 삼았다.
벼슬을 버리고 오미동을 찾은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작명이라 할 수 있다.
귀거래혜사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고 있거늘 어찌하여 돌아가지 않는가?
이제껏 내 마음 몸 위해 부림 받아 왔거늘
무엇 때문에 그대로 고민하여 홀로 슬퍼하는가?
이미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장래의 일은 올바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니,
실로 길 잘못 들어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 옳고 지난날은 글렀었음을 깨우쳤네.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출렁이고
바람은 펄펄 옷깃을 날리네.
길가는 사람에게 갈 길 물으면서
새벽 빛 어둑어둑함을 한하네.
멀리 집을 바라보고는
기쁨에 달려가니,
하인들이 반겨 맞아주고
어린 자식들 문앞에서 기다리네.
오솔길엔 풀이 우거졌으나
수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있네.
아이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니
술통엔 술이 가득하네.
술병과 술잔 가져다 자작하면서
뜰앞 나무가지 바라보며 기쁜 얼굴 짓고,
남창에 기대어 거리낌 없는 마음 푸니
좁은 방일지언정 몸의 편안함을 느끼네.
뜰은 날마다 돌아다니다 보니 바깥 마당 이루어지고
문은 있으되 언제나 닫혀 있네.
지팡이 짚고 다니다 아무데서나 쉬면서
때때로 고개 들어 먼 곳 바라보니,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해는 너웃너웃 지려 하는데도
외로운 소나무 쓰다듬으며 그대로 서성이네.
돌아가자!
세상 사람들과 사귐을 끊자!
세상과 나는 서로 등졌으니
다시 수레 몰고 나가야 무얼 얻겠는가?
친척들의 정다운 얘기 기꺼웁고
금(琴)과 책 즐기니 시름 사라지네.
농군들이 내게 봄 온 것 일러주며는
서쪽 밭에 씨뿌릴 채비하네.
포장친 수레 타기도 하고
조각배의 노를 젓기도 하며,
깊숙한 골짜기 찾아오기도 하고
울퉁불퉁한 언덕 오르기도 하네.
나무들은 싱싱하게 자라나고
샘물은 졸졸 흘러내리니,
만물이 철 따라 변함을 부러워하며
내 삶의 동정(動靜)을 배우게 되네.
아서라!
천지간에 몸 담았으되 다시 얼마나 생존하리?
어찌 본심 따라 분수대로 살지 않겠는가?
무얼 위해 허겁지겁하다가 어데로 가겠다는 건가?
부귀는 내 소망이 아니요,
천국(天國)은 가기 바랄 수 없는 것,
좋은 철 즐기며 홀로 나서서
지팡이 꽂아 놓고 풀 뽑기 김매기 하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긴 휘파람 불어 보고
맑은 시냇물 대하고 시를 읊기도 하네.
이렇게 자연 변화 따르다 목숨 다할 것이니,
주어진 운명 즐기는데 다시 무얼 의심하랴!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 而獨悲? 悟巳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 舟遙遙以輕 ,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憙徽. 乃瞻衡宇, 載欣載奔. 僕歡迎, 稚子候門. 三逕就荒, 松菊猶存. ○幼入室, 有酒盈 .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遐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峠峠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而相違, 得駕言兮焉求? 悅親○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 或命巾車, 或棹孤舟, 旣窈窈以尋壑, 亦崎嶇而經邱.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己矣乎! 寓形宇內得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 .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得奚疑?
(귀거래혜. 전원장무호불귀? 기자이심위형역, 해추창이독비 오사왕지불간, 지래자지가추. 실미도기미원, 각금시이작비. 주요요이경양, 풍표표이취의. 문정부이전로, 한신광지희휘. 내첨형우, 재흔재분. 동복환영, 치자후문. 삼경취황, 송국유존. ○유입실, 유주영준. 인호상이자작, 면정가이이○. 의남창이기오, 심용슬지역안 원일섭이성취, 문수설이상관. 책부노이유게, 시교수이하관.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 경예예이장입, 무고송이반환.
귀거래혜, 청식교이절유. 세여아이상위, 득가언혜언구? 열친○지정화, 락금서이소우. 농인고여이춘급, 장유사어서주. 혹명건차, 혹도고주, 기요요이심학, 역기구이경구. 목흔흔이향영, 천연연이시유, 선만물지득시, 감오생지행휴. 기의호! 우형우내득기시? 갈불위심임거유, 호위호황황욕하지? 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량진이고왕, 혹식장이운자. 등동고이서소, 임청유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락부천명득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