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나서 언제나 고향을 생각하고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본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五美里)인데 글자 그대로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깃든 마을이라 오미리(五美里) 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땅이 기름지며, 인심이 좋은 곳이라 7대조이신 ‘류이주’께서 오미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수원유수로 봉직하면서 수원성 축성의 책임을 다하고 자헌대부(정2품)에 오르다.-필자주)
그런데 이곳은 남한의 3대 명당 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필자의 7대조 ‘류이주’께서 230여 년 전에 터를 잡고 99간의 조선조 양반가옥을 건축하시고 구름(雲)은 마음대로 산을 넘나들고 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가는데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서 가리라 하며 읊었던 도연명의 귀거래혜사 에서 운(雲자와 조(鳥)자를 인용하여 사랑채 현판에 운조루(雲鳥樓) 라고 내걸었던 연유로 내가 태어난 종가는 운조루(雲鳥樓) 라고 불리고 있고 문화재로 등록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규모가 크고 웅장한 건축이 자랑이 아니라 조상대대로 운조루(雲鳥樓)에 내려온 조상의 가르침과 교훈이 현재를 사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므로 그 정신을 자라나는 청소년 여러분에게 자랑스럽게 전해주고 싶은 심정으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운조루 안채
크게 열 가지 정신을 이야기 하고 싶은데
첫째는 적선을 베푸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7대조 ‘류이주’께서는 행랑채 에다가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을 놓아두고 가난한 이웃이 끼니를 끓일 수 없을 때 언제라도 쌀독의 아래에 있는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다가 밥을 지어 먹도록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써놓았으니 그 뜻은 누구라도 능히 마개를 풀 수 있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러한 타인능해 정신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길이 본받아야할 귀중한 정신이라고 본다. 우리는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재산을 사회를 위해서 환원시키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어야 비로소 그 돈의 가치가 높아 질것이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둘째는 기록정신이다. 증조부(류형업)께서는 3대에 걸쳐 100여 년 동안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오래전에 정부에서 번역하여 다섯 권의 책을 발간한 바 있다.
흔히 일본 사람이 기록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하는데 이처럼 우리의 선조들도 기록을 했다는 점은 여러분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부터라도 스스로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가지고 매일 매일 자신이 걸어온 삶의 자취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리라 믿는다.
▲ 운조루 사랑채
셋째는 풍류정신이다. 조부께서는 어렸을 때 눈여겨 보았지만 친우들과 만나서 약주를 드실 때에 늘 운자를 내놓고 시조를 지으시면서 담소를 즐기셨고 나는 그 곁에서 벼루에 먹을 갈아드렸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렇게 지은 시조가 일만 여 편이 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여섯 번의 시집을 출간했지만 겨우 일천 여 편에 그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하여 항상 시(詩)를 가까이 하고 독서를 즐겨야 된다.
넷째는 효도정신이다. 백 여 년 동안의 생활일기를 보면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부모님에 대한 공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산소의 묘지를 가꾸고 제사를 모시는 일에 치중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집안에 석 달 동안 시신을 모시는 가빈터가 있어 육탈이 다된 다음에야 산에 묘지를 만들어 안장시켰다고 한다. 사후에까지 지극 정성을 다한 효도 정신을 요즈음 어린이 여러분은 과연 할 수 있을 런지 집에서 부모님 말씀 잘 듣는 효성이 지극한 어린이 인지 묻고 싶다.
다섯 번째는 분수에 맞는 정신이다. 7대조 ‘류이주’께서는 아들이 기거하는 사랑채에 수분실 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항상 제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도록 늘 가르쳐주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11대에 걸쳐 망하지 않고 종가를 지키며 살아오고 있으니 여러분도 운조루의 정신을 본받아 훌륭한 미래를 꿈꾸며 멋진 삶을 설계하고 인류를 위해 공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 운조루 행랑채
여섯 번째는 여성존중의 휴머니즘 정신이다. 운조루의 건물 동편은 할머니의 사랑채가 있고 서편엔 할아버지의 사랑채(7대 조부모를 지칭-편집자주)가 있도록 건축하였는데 이처럼 여성을 위한 공간을 남여가 대등한 위치에 좌우로 배치한 예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여성들을 위한 공간의 배려라는 점에서 나는 휴머니즘이 넘치는 정신이 아닌가 보고 싶다.
그 외에도 사랑마당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바라보며 바깥 구경을 숨어서 할 수 있도록 안채의 부엌위에 전망 창을 두었으며 먼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할머니(7대 조부모를 지칭) 기거하시는 부엌 윗칸에도 전망 창을 만들어 놓은걸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할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은 할머니의 사랑채가 남아 있지 아니하므로 빠른 시일 내에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일곱 번째는 선정을 베푸는 선정정신이다. 7대조께서 낙안군수로 재직하시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을 때 낙안군민들이 부임지로 향하는 7대조의 길을 가로 막고 엎드려 울며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시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감안하면 선정을 베풀었던 게 아닌 가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 당시에 공적비가 있을 터인데 후손인 우리가 그것을 찾을 길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여덟 번째는 건축을 사랑한 정신이다. 7대조이신 ‘류이주’께서는 조선조 정조대왕 시절에 수원유수로 봉직 하면서 그 당시 정약용이 설계한 수원 화성의 축성 책이 감독을 하신 것으로 되어있다. 성을 쌓은 기록인 토성기는 고려대 박물관에 오래전에 기증을 하였다.
그 당시에 어떤 신하가 정조왕 앞에서 엎드려 물었다고 한다 "전하! 적을 막아내려면 성을 튼튼하게 쌓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아름답게 치장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정조가 대답하기를 "아름다움이 능히 적을 이기느니라" 라고 대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군왕인가. 나는 감탄 하지 않을 수 없다. 수원시청 청사엔 이 글귀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7대조는 수원성을 잘 쌓은 공로로 2계급 특진을 하여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건축을 사랑한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든다.
▲ 7대조 ‘류이주’께서는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을 놓아두고 가난한 이웃이 끼니를 끓일 수 없을 때 쌀독의 아래에 있는 마개를 돌려서 쌀을 빼다가 밥을 지어 먹도록 허용하였다.
아홉 번째는 절개를 지키는 선비 정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성씨개명을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우리 집안은 이에 응하지 안했다고 한다.
이런 점은 나라를 빼앗긴 아픔 속에서도 절개를 굳게 지킨 선비로서의 체통과 그 정신이 올곧게 살아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된다. 한일 합방을 비관하고 자결한 황매천 열사도 증조부님(류형업)과 늘 함께 하시며 시조를 읊으며 운조루에서 오래오래 생활하였음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는 이웃을 사랑한 겸애의 정신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을 한 것은 물론이요,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끼니때마다 연기가 보이는 것조차 미안 해 하는 심정으로 굴뚝을 모두 처마 밑에다 축조하여 마당에 연기가 깔리도록 배려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모기라던가 해충을 마당에서 쫒기 위한 것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마당이 있지 않은 곳의 굴뚝도 모두 낮게 한걸 보면 역시 이웃을 배려한 정신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까지 운조루의 10대 정신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는데 조선조 양반 가옥이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운조루를 찾지 마시고 어린이 손을 잡고 오시면 반드시 운조루의 정신을 일러 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운조루의 정신을 지면을 통해서 소개하는 바이다.
그동안 운조루의 유물을 여러 차례 도둑을 맞았기에 유물 전시관의 건립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에 와 있으며 일부 훼손된 건물의 복원도 필요하다고 본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라며 정부당국에서 하루 속히 운조루의 유물 전시실 건립을 해주시길 마지막으로 당부하며 필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