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他人能解).’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대저택 운조루(雲鳥樓)의 쌀 뒤주에 새겨진 글로, 의역하면 ‘누구나 맘대로 퍼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놓인 위치부터 예사롭지 않다. 통상 뒤주라면 안채 깊숙이 자리 잡게 마련. 그런데 외부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랑채 부엌에 놓여 있으니 빈궁한 이웃들이 쌀을 퍼가기 딱 좋지 않은가. 게다가 원통형 뒤주 하단부의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 쓰여 있기를, ‘타인능해’라니….
집주인은 적선에 그치지 않고, 쌀을 얻어가는 사람의 자존심까지 세심히 배려했던 것 같다. 주인과 직접 대면해 쌀을 얻어가려면 그 누구라도 계면쩍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운조루는 조선 영조 때인 1776년 낙안(현재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일대) 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집이다. 원래는 99칸의 ‘고대광실’이었다. 230여년의 시간이 흐르며 현재는 약 60여칸만 허름하게 남아 있다. 그래도 대가의 풍모는 여전하다. 4년 전부터 시어머니(75)를 모시고 사는 셋째 며느리 곽영숙(37·사진)씨는 “처음에는 청소하기도 너무 힘들었다”며 “살림하며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입안이 헐 때도 많았다”고 짐짓 푸념한다.
운조루가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광실이어서가 아니다. ‘타인능해’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베풂과 나눔을 실천한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지금도 집 안 도처에서 가난한 이웃을 배려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지붕 위로 솟은 굴뚝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건물 아래 기단(基壇)으로 구멍을 내 이곳으로 연기가 빠지도록 해 놓았다. 부잣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끼니를 거른 이웃들이 한층 더 힘들어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하지만 높은 굴뚝이 없다 보니 운조루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온 집 안에 눈이 매울 정도로 연기가 자욱했다는 게 곽씨의 설명이다.
동학과 여순사건,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운조루가 멀쩡했던 것은 두텁게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지리산 빨치산에 가담한 이 집안 머슴들은 자기 상전 집이었던 운조루를 불태우는 것에는 극력 반대했다고 한다.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올 때도 류씨 집안 사람들은 미리 피신할 수 있도록 머슴들이 하루 전날 귀띔해줬다는 게 곽씨의 얘기다. 그러고 보니 운조루 뒤편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노고단이다.
현재 운조루의 집안 살림살이에선 옛 영화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사실 윤택해 보이지도 않는다. 전답이 꽤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여느 농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시골 살림살이다. 그래도 후손 역시 선조들 못지않게 후덕하기만 하다.
일제 때 동네 서당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내놓은 전답의 경작료가 지금은 동네 노인들 여행 경비로 사용된다는 말을 듣고 ‘되찾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곽씨는 “지금도 우리 살기엔 충분한 땅이 있다”며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몇 해 전 동네에 우물이 필요하다고 할 때도 집안 땅을 흔쾌히 내놨다. 매년 초복이면 동네 노인정에 집에서 키우는 닭도 내놓는다.
“맘이 좁아서 조상들같이는 못한다”라면서도 “선조들에게 누는 끼치지 않게 살려고 한다”는 게 곽씨의 말이다.
따스한 3월의 봄 햇살이 운조루 앞마당에 가득하자, 곽씨와 딸 고은(3)이가 봄바람을 쐬러 나왔다. 곽씨는 감기라도 걸릴까 고은이에게 겉옷을 입히려 하지만, 봄기운을 이기지 못한 듯 고은이는 한사코 가벼운 셔츠만을 고집한다.
기와 담장을 따라 산수유와 매화, 동백꽃이 활짝 핀 걸 보니, 꽃샘바람이 매서워도 이제 완연한 봄이다. 없는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고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운조루에 비치는 봄 햇살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