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조선의 거상-경영을 말하다

운조루 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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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 류 부잣집

天下不患無財 患無人以分之

천하에 재물이 부족함을 걱정하지 말고

나누어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라

관자(管子)


부는 이루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욱 어렵다. 그럼 부를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회와 더불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즉 재물을 쌓는 일 못지않게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재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없지만, 민심으로는 재물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부자 중 민심으로 재물을 지킨 대표적인 경우로는 단연 경주의 최 부잣집과 구례  운조루(雲鳥樓)의 류 부잣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만석꾼 부자였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수많은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부린 만큼 이 두 집안은 언제나 민심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을 잃은 나라가 온전할 수 없듯 19세기 이후 숱한 농민 반란과 항쟁 속에서 소작농의 마음을 잃은 지주들 또한 결코 온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두 집안은 오늘날까지 수백 년에 걸쳐 집안의 부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평소 민심을 두려워하고 농민의 가난과 고통을 함께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왕희지와 더불어 중국 서예의 쌍벽이라고 불리는 안진경의 직계 선조 가운데 안지추라는 사람이 있다.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로 넘어가는 격동과 혼란의 세월을 보낸 안지추는 자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안씨 가훈(顔氏家訓)》을 남겼다. 이 책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소중하게 다룬 명가훈의 대접을 받았다. 이 집안에서 안진경과 같은 명사가 여럿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안씨 가훈》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가득 채우는 욕심은 귀신도 싫어한다”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재물을 덜어낼 줄 안다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안지추는 만약 일정한 수준 이상 부를 쌓았다면 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흩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끝없이 욕심을 부리다 보면 반드시 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류 부잣집은 안지추처럼 가득 채우는 욕심이 가져올 재앙과 환난을 정확히 꿰뚫어 본 만석꾼 부자였다. 그럼 류 부잣집이 부를 유지한 비결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조선시대의 부자들 중 오늘날까지 부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이나 집안은 거의 없다. 부의 흐름이나 경제적 변동을 잘못 헤아려 재물을 잃은 사람도 많지만 19세를 뒤흔든 농민항쟁과 민란의 소용돌이 혹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경제외적인 이유로 재물을 잃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좌익과 빨치산의 활동이 왕성했던 지리산 밑 구례에 둥지를 틀고 있던 류 부잣집 또한 이 거대한 소용돌이와 혼란을 피해갈 수 없었다.


류 부잣집은 구례 일대의 대지주였던 만큼 재물과 대저택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위기를 숱하게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류 부잣집은 빨치산에 가담하고 있던 집안의 머슴이나 소작인들이 적극 나서 방어해주었기 때문에 재앙을 피할 수 있었고, 대저택 운조루 역시 멀쩡하게 본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쌀뒤주의 마개를 열 수 있게 하라

대지주에 대한 머슴이나 소작인들의 분노와 저항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기에 호남 최고의 부자라는 소리를 들은 류 부잣집이 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 집안이 대를 이어 주변 사람들에게 적선을 많이 해 인심을 얻은 덕가(德家)였기 때문이다.


《주역(周易)》의 ‘곤괘문언전(坤卦文言傳)’에 보면,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선행을 많이 쌓은 집안은 반드시 좋은 일이 있지만, 악행을 많이 쌓은 집은 반드시 재앙을 받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류 부잣집을 두고 ‘적선지가(積善之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적선지가’라는 명성을 대변하는 명물이 오늘날까지도 운조루에 남아 전해오고 있다.


운조루는 1776년 영조 시대에 류 부잣집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류이주라는 인물이 세운 99칸의 대저택인데, 이곳 곳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쌀뒤주가 있다. ‘타인능해’는 글자 그대로 ‘누구나 마음대로 쌀뒤주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아무나 류 부잣집 곳간에 들어가 쌀뒤주의 마개를 열어 쌀을 가져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보통 권력이 높아질수록 성벽과 담장을 높이 쌓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대문을 굳게 닫아걸게 마련인데, 류 부잣집은 재물이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대문을 활짝 열어 더 많은 사람이 이곳 쌀뒤주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쌀뒤주를 이용한 사람은 대개 구례 일대의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더러 운조루와 지리산을 찾아오는 나그네들도 이곳을 통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특히 류 부잣집은 집주인을 직접 마주치지 않고 쌀을 가져갈 수 있는 장소에 쌀뒤주를 두었는데, 이것은 쌀을 가져가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뒤주에서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분량은 대개 한 되 혹은 두 되로, 류 부잣집의 쌀뒤주에서 가져간 쌀의 분량이 1년에 36가마 정도 되었다. 류 부잣집의 1년 수확량이 평균 200가마였다고 하니, 쌀 소득의 20%가량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눈 셈이다. 운조루는 멀리서 밥을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세웠는데, 이 또한 굶주린 사람들이 밥을 짓는 연기를 보고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단순히 재물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의 마음까지 껴안으려고 한 류 부잣집 사람들의 덕성(德性)을 알 수 있는 일화라고 하겠다.


세상과 더불어 이익을 나누어야 할 이유

경주 최 부잣집이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한 비결이 육훈과 육연에 있었다면, 구례 류 부잣집이 오늘날까지 부를 유지한 비결은 ‘타인능해’의 정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집안의 가훈과 정신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세상과 더불어 이익을 나누라’는 것이다.


관자는 “세상과 더불어 이익을 같이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지만, 세상의 이익을 독점하려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없애려고 도모한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사람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태롭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없애려고 도모하는 사람은 비록 제왕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반드시 몸을 망치고 몰락한다.


또한 사마천은 “사람은 곳간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음식과 의복이 넉넉해야 영화로움과 욕됨을 안다. 예절이라는 것은 재물이 있고 없고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고 했다. 의식주가 넉넉한 사람은 물건을 빼앗거나 남을 해치는 무모한 일을 쉽게 도모하지 않지만, 굶주림에 지친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가난하고 굶주림에 지친 사람이라고 해도,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해치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의식주가 넉넉한 사람보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이 도적이나 강도가 될 확률이 확실히 높은 것만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천만금의 재물을 쌓아둔 부자의 주변에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이 가득하다면, 그 부자의 재물은 높다란 모래 성 위에 자리하고 있는 누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지킬 수도 없는 재물을 두고 공연히 헛된 욕심만 부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바로 옆에 도적과 강도를 기르면서도 호의호식(好衣好食)을 즐기는 멍청이일 뿐이다. 만약 그가 재물을 나누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 순간 재물을 빼앗는 도적과 강도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를 보호하는 지지자로 변할 것이다. 재물을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또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더 ‘세상과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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