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박경숙
ㆍ작성일	2010-05-20 (목) 05:15

ㆍ추천: 0 ㆍ조회: 2747

송광사 데이트
송광사 데이트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 야간반 박경숙

흐린 날이다. 잿빛 구름이 오늘따라 부쩍 두텁게 내려앉아 있다. 곧 비라도 내릴 하늘이다. 이런 날엔 이상하게도 우리 집 베란다의 꽃들이 한층 더 진한 재색을 띠며 활짝 웃고 있다. 라벤다의 진보랏빛이라든지, 향기로운 제라늄 무더기와, 남극의 향취가 물신 풍기는 시계 꽃의 붉은 교태까지, 그 향기와 색상이 진해지는 신비로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서 마치 진공관에 갇혀 있는 어린아이처럼 이 투명하고 평안하며 아늑한 기분은 어디서 오는 걸까. 우리 부부는 가끔 그 답을 엉뚱한 데서 찾는다.

‘따르릉~’ 어김없이 오전 열시와 열한 시 사이에 결려오는 남편의 전화벨 소리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이 시각에 집에 혼자 남아 심심할 것 같은 나를 위한 위로의 전화일 수도 있다. 허나 대부분은 이렇게 날씨(?)까지 좋으니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한 메신저다. 남편은 이제 막 회사에서 머리가 복잡한 일을 끝마쳤거나 생각지도 않은 기분 좋은 계약을 무사히 따냈을 때 버릇처럼 언제나 나를 찾곤 한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있는 행사라고나 할까. 그 때마다 우리 부부에게 데이트 코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날 하루 마음 가는대로 발길 닿는 대로 어느 곳이든 둘 만 있을 장소를 찾아서 차의 시동을 걸고 무한정 바람을 즐긴다. 텁텁한 도심의 가슴을 상쾌하게 날려 보낼 수만 있다면 더 없이 만족이다. 오늘은 완주군 소양에 있는 송광사가 있는 가까운 교외로 나가기로 했다. 소양에는 송광사를 비롯해서 위봉폭포와 위봉사, 조용한 찻집도 꽤 있을 뿐 아니라 아늑하고 한적한 식당도 몇 집 찾아 두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한다. 오후 4시에 접어드는 시골의 고즈넉한 시간은 사람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전율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듯하다. 차창밖에는 빗물을 머금은 꽃잎들이 살아 숨쉬는 현실과의 접촉을 한시라도 놓지 않으려는 듯 온몸으로 봄비를 맞고 있다. 비가 되어 건너 온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은 무엇을 겪고 또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나. 어릴 적 외톨이 점박이 무당개구리를 잡아다가 장롱 다리에 실을 묶어 놓던 철부지가 아직도 그 개천에서 놀고 있을지 상상해 본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농촌봉사활동과 M.T 장소로 이따금 송광사를 찾곤 했었다. 그러나 엄하신 부모님 때문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은 장소 중 하나다. 연애란 걸 꿈도 꾸지 못한 시절, 자전거를 가르쳐 준다며 늘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동기생을 골탕 먹이려고 멀리까지 왔다가 우연히 마주한 소양의 아름다운 코스모스 길은 어떤가. 차비가 부족해서 혼자만 버스를 잡아타고 집에 가면서 땀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가는 그 녀석을 창밖으로 보다가 미안했던 웃지 못할 추억이 깃는 곳도 여기 어디쯤일 게다. 더벅머리 그 친구도 지금은 아들딸 낳고 옛일을 추억하며 잘 살고 있겠지. 생은 마치 희미한 삽화처럼 물이 들어가지만 감색 교복 스커트를 허리춤에 감싸고 발목을 젖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소녀도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남편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근육만들기에 열심이었을까?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정체 없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볼멘소리를 건넸다.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각이지만 경치 좋은 위치에 다소곳이 자리한 식당엔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낮부터 점심을 하고 난 후 담소가 길어진 사람도 있을 테고, 삼삼오오 여자친구들끼리 한적한 풍광을 즐기러 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비 때문에 초록의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산과 들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긴 길 넘어 뿌연 안개에 덮인 산하는 모락모락 새하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운무가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어서 장관이다. 산 전체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이는 창이 넓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우리 부부의 지정석이기도 하다. 익숙한 주인아저씨와 가볍게 인사도 나눴다. 식사 주문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사이 우리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남들은 다 일하고 있을 이 애매한 시간에 다정히 앉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열띤 공방을 하고 있는 눈치들이다. 어느 자리에선 빙긋이 웃으며 우리 둘 사이를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겸연쩍은 눈인사로 대신한다. 매번 겪는 일이만 그래도 늘 달갑지만은 않다. 언제부터 합법적인 부부의 다정한 포즈가 남에게 눈엣가시처럼 보이게 되었는지.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일일이 결혼사진을 보여주어야 하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엔 아이들 이야기도 꺼내면서 부적절한 의심에서 벗어나 보려 나름대로 노력을 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이율배반적 마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손도 잡고 팔짱도 끼면서 간간히 애정표현도 은근히 즐겼다. 세월이 가면서 나이 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우리 부부지만 여느 보통 집 아낙과 생김부터가 다른 아내를 애인처럼 슬슬 장난까지 거는 남편의 여유도 그때부터 생겼다.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기 위한 소풍 길에 때때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까지 덤으로 만끽하는 색다른 데이트지만 세월에 익숙해져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촘촘히 내리는 비사이로 송광사 옆에 맛 좋은 전통 찻집이 새로 생겼다며 침 마르게 칭찬하는 동무를 생각해서 찾아 갔다. 처녀 때 어머니와 함께 꽃구경을 갔던 매화나무 정자는 온데간데 없다. 변한 걸 분간하지 못하게 참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우산 하나 나눠 쓰고 송광사 구경도 하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출출했던지 남편이 갑자기 포장마차 얘기를 꺼냈다. 야식을 하면 건강을 해친다는 내 잔소리는 이미 귓전에도 없는 눈치다. 너무 이른 시간에 저녁을 마치고 밤 열시를 넘겼으니 왠지 매정하게 굴기엔 조금 아쉬웠다.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신혼 때 자주 갔던 버스 정류장 옆 허름한 포장마차를 찾았다. 오랜만에 발길을 옮긴 탓인지 사람들로 북적대던 광장은 사라지고 산뜻하게 포장되어 전혀 다른 주차장으로 변했다. 한참 두리번거려 찾은 포장마차는 그 주차장 안에 깨끗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 손님이 제일 없는 가운데 ‘인심 좋은 집’으로 들어갔다. 대학생 4명이 늦은 밤까지 술은 마실 뿐이었다. 꼼장어 한 접시를 시키고 따뜻한 국물을 뜨자니 마흔이 갓 넘겨 보이는 주인 얼굴에 서늘한 근심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심 좋다는 이 집 주인의 인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집 포장마차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짐작으로 우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손님이 없어서 마음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주머니를 불러 국수 한 그릇을 더 부탁했다. 꼼장어도 다 먹지 못할 판에 국수까지 더하니 남편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아주머니가 안돼 보여서요.” 매번 써먹는 수법이라 남편도 금방 알아챈다. 주인여자 얼굴에 잠시 실낱 같은 웃음이 번졌다. 조금 있으니 한 무더기의 남자 손님들이 시끌벅적 들어 왔다. 그 뒤를 이어 여러 명의 대학생들이 우르르 자리에 앉는다. “당신이 손님을 몰고 다니는 줄은 그 전부터 잘 알고 있긴 한데, 가끔은 우리 사무실에도 좀 나와 보지 그래요?” 남편의 농담 섞인 칭찬이다.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아주머니에게 남은 음식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며 일어섰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가 빠른 아주머니가 함박웃음을 보내며 따뜻하게 두 손을 감싼다. “아주머니, 부자 되십시오.” 남편도 한마디 거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시원하게 비를 뿌린다. 오늘 하루 훈훈한 내 마음 같다. 가만히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기분이 참 좋았다. 나도 어쩌면 한 점 분신처럼 봄과 같이 간격을 반복하며 세상과 깊이 내통하고 싶은 것일까. 생의 나이테만큼 희미하게 번져오는 봄의 정령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싱그러운 봄의 왈츠처럼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깊은 밤 빗소리가 음악처럼 살갑고 간지럽다.

(2010.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