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에는 농부의 얼과 정성이 숨어있다. 쌀(米)이 식탁에 오르기 까지는 여든여덟 번의 손길이 간다는데, 어려서 농사일을 해보기는 했어도 농부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본 적이 없다. 쌀은 우리의 주식이요, 민족의 생명이며, 문화요, 우리의 정신이다. 지금이야 쌀 한 가마 가치가 별 것 아니라지만 옛날엔 황금 같았다. 1960년대에는 월급이 쌀 3가마 정도였다. 쌀 한 가마를 시골에 빚으로 놓고, 잊은 듯 기다리면 몇 년 안에 큰 재산이 된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내가 퇴직 후 7개월쯤 지나서였을까? 외출에서 돌아오니 우리 집에 보낸 사람 이름도 밝히지 않고 쌀 한 가마가 배달되었다. 그런데 누가 왜 이름도 밝히지 않고 보낸 것일까? 아무리 수소문해도 보내 준 사람을 찾지 못하여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겼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쌀 택배’는 미궁(迷宮)에 빠졌다. 처음에는 보낼만한 분들을 찾아 여기저기 전화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잘못하면 큰 실례를 범할 것 같아 말도 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어느 인심 후한 분이 탈곡을 해서 집으로 보내는 김에 선물한 것이겠지 생각했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찾아봅시다.”
아내와 나는 시간도 많고 나들이도 할 겸, 보낸 이를 찾아 고마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호남평야 500리(200㎞)를 누볐다. 첫날에는 쌀 마대에 희미하게 찍힌 도정공장 이름을 찾아, 김제평야부터 부안까지 들녘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하기로 했다. 그때쯤 도정해서 택배로 부친 사람이 누군가, 그 근처에 나와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살고 있지는 않는가? 수소문해 보기를 이틀, 심지어 쌀 포대를 싣고 다니며, 그 재질을 비교해 보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수긍이 간다는 도정공장에서 상대하는 택배회사가 어디인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사흗날은 택배회사를 찾아 다녔다. 김제와 부안의 인근 택배회사를 찾아 다니며 보여주기를 꺼리는 택배일지까지 확인하는 등 알아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럭저럭 헤매기를 나흘, 햇볕에 그을리고 목도 타니 우리의 ‘진실게임’도 문을 닫자고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싶어 아내와 얼굴을 마주 보며 웃기도 했다. 초가을 들녘의 따가운 햇볕에 그을기를 또 이틀, 결국 우리는 숨은 선행자 찾기를 포기하고 차를 전주로 몰았다.
1980년대 임실 W학교에서 근무할 때 나이 드신 선배 한 분이 교감 연수지명을 받는 바람에 임시 담임을 구해야 (당시에는 본인이 채용) 할 처지였다. 마땅한 강사를 찾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는 지라 내가 학급담임이 되어 두어 달 보충수업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 답례로 가을에 햅쌀 한 가마를 보내 주었던 적이 있었다. 어찌나 쌀이 좋고 밥이 맛있었던지, 그 고마움이 오래오래 기억되었다. ‘진실을 밝히려는 나흘’ 동안 나는 생각해 보았다. 왜 하필이면 쌀을 보냈을까? 왜 그토록 이름 밝히기를 꺼려했을까? 그 속에는 보낸 이의 마음이 숨어 있었으리라. 고마움이었을까 아니면 ‘별 것도 아닌데’하는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혹시 쑥스러워서는 아닐까? 어려운 때 도움을 받았으니 어려울 때 알곡으로 보답하노니 오래오래 그 뜻을 간직하라는 의미였으리라. 나는 ‘숨어 보낸 택배’를 교훈삼아 쌀(米)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일깨워주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베풀어야 할 것인가를 늦게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밝히지 못한 ‘쌀 한 가마’의 비밀로 인해 아내는 나에게 숨은 여인이 있어 보내 준 것이 아니냐며 놀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르고 농사일에 땀방울을 쏟는 이름 모를 고즈넉한 여인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한다.
요즘에도 햇곡 3㎏짜리 포대가 선물로 배달되면 “당신 숨은 여인이 또 쌀을 보내왔으니, 이번에는 꼭 들녘을 한 바퀴 돌며 밝히자고 다그친다. 그러면 아무 잘못도 없는 나는 움찔하고 놀란다. ‘미궁(迷宮)의 쌀 택배’로 인한 뙤약볕 속을 헤맨 나흘이 떠오른다. 그 쌀 한 가마는 나에게 인정과 지혜 그리고 넓은 마음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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