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쓰기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느라 시내버스를 탔는데, 모래내 시장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내가 탄 버스를 탔다. 수박 한 덩이를 들고 탄 수더분한 인상의 그 아주머니 때문에 버스 출발시간이 약간 지체됐다. 운전기사가 옆집 아주머니 대하듯
“뭔 수박을 그렇게 무겁게 들고 오세요?”
하고 묻자,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응! 조금 있다가 텔레비전에서 월드컵 여자축구를 보면서 먹으려고.”
친근한 대화를 나누기에 나는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앞좌석에 앉은 아주머니가,
“기사님, 이따가 나 내릴 때 앞문으로 좀 내리면 안 될까요? 수박 들고 뒷문까지 가기가 힘들어서.”
부탁하는 걸 보니 처음 보는 사이 같았다. 운전기사는 손님이 별로 없는 밤 시간인데 그게 뭐가 어렵겠냐며 내릴 때 말하라고 했다. 시내버스 안에서 가끔 보게 되는 이런 정겨운 모습은 고향 사람들을 만난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사는 전주 안골은 완주군 봉동 쪽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들이 많이 지나간다. 오전 9~10시쯤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타게 되면, 큼직한 채소 보따리들이 버스바닥을 차지하고 있고, 승객들은 대부분 검게 그을은 초로(初老)의 아저씨들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들이다. 이 분들은 대부분 모래내 시장이나 중앙시장 앞에서 내리는데, 한 사람이 서너 개씩의 무거운 채소 보따리를 들고 내린다. 어떤 할머니는 자기 몸무게보다도 더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끌어 내리는데 그럴 때면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준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소박한 우리네 인정이 아직 남아 있어 푸근하다.
얼마 전 전주역 쪽으로 가는 버스에서였다. 한낮이었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할머니 한 분이 타시기에 내가 자리를 양보했더니, 곧 바로 출입문 쪽에 앉아 있던 아가씨가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내가 괜찮다고 해도 자기는 금방 내릴 거라며 자꾸 자리를 권하기에 앉았다. 그 아가씨보다 내가 먼저 전주역 앞에서 내리며 그 아가씨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 아가씨가 수줍게 웃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버스에서 내려 걷는 내 마음이 노랑 빨강 채송화 꽃이 된 듯 기분이 좋았다. 요즘은 학생들도 공부하느라 지쳐서인지 버스에서 어른들에게 자리양보를 잘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예의 바른 젊은이를 만나게 되면 길을 가다가 시원한 냉수를 한 잔 얻어 마신듯 상쾌하다. 시내버스에서나 맡아볼 수 있는 사람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시내버스를 즐겨 타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부터이다. 가족들과 같이 이동할 때는 남편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지만, 혼자 외출을 할 때는 대부분 택시를 탔었다. 15년도 더 된 내 운전면허증은 장롱 면허증이 되고 운전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승용차 유지비만큼만 택시를 타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내 직업을 바꾸면서 수입이 줄어들자 시내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루하게 버스를 기다리는 내 모습이 너무 궁상스러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었다. 그러나 시내버스를 자주 타다보니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출발한 시내버스 안에는 고향 텃밭이 들어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이웃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순박한 인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분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흙냄새 사람냄새가 점점 좋아지는 것은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시내버스를 타면 사람의 향기를 맡는 즐거움뿐만이 아니다, 교통비 절감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환승제가 실시된 이후로는 시내에 가벼운 볼 일이 있을 때 단돈 구백오십원으로 왕복교통비를 해결 할 수도 있다. 나는 짐이 많거나 다급한 경우를 빼고는 꼭 시내버스를 타는데, 내 한 달 교통비는 전에 비해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얻는 또 한 가지 보너스는 재미있는 거리풍경을 감상하는 일이다. 승용차나 택시에 비해 높은 좌석에서 내려다보는 거리풍경은, 택시나 승용차에 비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훨씬 많다. 독특한 상호의 간판들이 나를 미소짓게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얼굴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신문을 읽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달리는 시내버스 차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푸른 하늘에서 떠가는 뭉게구름이 너무도 멋이 있어서 금방 번개 시(?) 한 편을 쓰기도 했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최근 들어 시내버스는 여러모로 좋아졌다. 냉난방도 잘 되어 요즘 같은 여름에는 승용차를 타는 것보다 오히려 더 시원하다. 버스를 타려면 한참 기다려야하는 지루함이 있지만,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거리풍경을 구경하면서 기다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옛날, 너나없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덜덜거리며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요즘 시내버스는 많이 고급스러워졌다. 어쩌면 그 옛날 고관대작들이 탔던 가마보다도 더 호사스럽다.
수박을 들고 앉았던 그 아주머니가 벨을 눌렀다. 우리 동네에 사는 모양이다. 운전기사는 약속대로 버스 앞문을 열어주었다. 동중학교 앞에서 그 아주머니와 나느 앞문으로 편하게 내렸다. 어둠속에서 그 아주머니와 헤어지고 집으로 걷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옛날 우리 집 앞을 흐르던 도랑물 소리가 졸졸졸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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