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병규
ㆍ작성일	2010-07-26 (월) 17:55

ㆍ추천: 0 ㆍ조회: 2650

공원에서 만난 팔순이 노병
공원에서 만난 팔순의 노병(老兵)
행촌수필문학회 김병규

오랜만에 덕진공원을 찾았습니다. 갓 피어난 연꽃은 열아홉 소녀의 얼굴처럼 청초(淸楚)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솔솔 날리는 연향(蓮香)을 맡으며 출렁대는 연화교를 건널 때, 꿈에 본 천국처럼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걷고 싶었던 길이었던가? 절망적인 병상에서 한 고비를 넘기고 내 발로 걸을 수 있어서 눈물이 쏟아지도록 감격스러웠습니다.

지난 3월에는 3차 허리뼈 시술을 받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통증을 견디지 못하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한 20여 일 동안 입을 다물면 죽으리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것이 목숨이라더니 120여 일의 고통 끝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때 병실 창문으로 덕진공원의 전경(前景)이 보였습니다. 뭉게구름처럼 벚꽃이 만발한 공원이 나에겐 다시 찾을 수 없는 신기루(蜃氣樓)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다시 살아난다면 덕진공원부터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기적은 날 외면하지 않았나 봅니다. 모진 고통을 딛고 일어나 찾아간 덕진공원은 나에게 내 생애 최상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오랜 병상생활을 하다 보니 인정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일가친척과 이웃사촌, 오래 사귀던 친구들이 미치도록 그리웠습니다. 사람이 그리운 것은 오랜 기간 투병자의 외로움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만나면 반가운 것이 투병자의 감정이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정을 주고받고 싶은 것이 요즘 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공원의 정자에 앉았습니다. 나와 처지가 비슷할 듯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도 몸이 온전치 못한 듯 보였습니다. 나와 비슷한 연배(年輩)인 듯싶어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그는 6·25 참전용사라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인사를 청했습니다. 그의 어감(語感)에는 북녘의 말투가 섞여 있었습니다. 6·25 때 내 나이 14살이었으니 참전용사라면 내 연상일 텐데 그는 대뜸 나에게 형님이라는 호칭을 했습니다. 내가 오랜 병석에 있어 폭삭 늙어 보인 듯 했습니다. 그는 1930년생이니 나보다 무려 7년이나 연상이었습니다. 호칭을 바꾸자고 했으나 그는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구나 고희를 넘기도록 살아온 동안 평탄하고 행복하게만 살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도 더러는 있겠으나, 대부분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이 한 많은 인생길인 듯싶습니다. 특히나 험난한 난세(亂世)를 살아온 우리 세대가 걸어온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나는 정자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처럼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놨습니다. 그의 언행에는 진실이 담겨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중산층 가정의 큰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열아홉 살, 인민군에 징집(徵集)될 때까지 푸른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입영 다음해에 발발한 6·25 전쟁에 참전을 했습니다. 전세는 승전고를 울리며 큰 전투 없이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전진만 계속하던 부대원들은 조국통일의 영웅이 되리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습니다. 낙동강 전투에서는 용맹스런 국군들의 완강(頑剛)한 저항으로 부상병이 속출했습니다. 부대에서 16살에서 17살, 그 어린 병사들을 최전선에 배치해 놓아 총알받이로 삼는 행위에 그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할 때, 부상병이 발생하면 부상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살해 버리는 광경을 보고 전율을 느꼈습니다. 전세는 역전되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후퇴할 때 진격하는 국군의 포위망에 걸려 부대원 모두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평양까지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살고 있을 고향집을 찾았습니다. 전쟁이 쓸고 간 고향 집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집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천애(天涯)의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남쪽으로 가는 것이 그가 살 길이라 판단했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또 바뀐 때, 부대에 재편성된 그는 다시 남진대열에 끼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던 그는 운 좋게 1·4후퇴 피난민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천애의 고아가 된 그는 국군에 자원입대를 했습니다. 어제의 인민군이 오늘은 국군으로 둔갑을 했던 것입니다. 육군 특무상사로 진급될 때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서 그는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악명 높은 아이스크림고지와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과의 그 처절한 육박전에서도 그는 살아났습니다. 헤어진 가족과는 만날 길도 없이 46살에 제대할 때까지 그는 20년간의 군대 생활을 충실히 했습니다.

그는 육군 상사 시절 전주 여자를 아내로 맞아 2남 2녀를 두었습니다. 자식들이 잘 자라 제 각기 제 길을 찾아가고 노부부가 노년을 오붓하게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뇌졸중이란 적에 기습을 받아 쓰러졌습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치열했던 격전장, 피아를 가릴 수 없었던 육탄전에서도 부상 한 번 당하지 않고 살아온 노병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금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재활치료를 하는 중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공원에서 만난 6·25 천전용사인 노병의 이야기였습니다.

향기로운 연꽃은 지고 나면 내년에 다시 피지만, 우리네 인생은 한 번 지면 그만이니 사는 동안 보람 있게 살자며, 그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미수(米壽)의 황혼에 뇌수술을 받고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노병의 이야기에서, 나는 나의 신상을 생각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아직도 찬란한 꿈이 잡힐 듯했습니다. 희망을 꿈꾸는 우리들의 가슴에 행복의 여신이 손짓하는 듯 보여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태양은 아름답고 곱게 핀 놀을 데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녘 하늘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2010.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