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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최정순
ㆍ작성일	2010-07-23 (금)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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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같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아버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수필창작 금요반 최정순

내 어린 시절에는 물자가 귀해 종이 한 장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나는 언제부턴가 광고지나 달력 뒷면이 아까워 접어놓는다. 명절에 어린 손자손녀가 와서 허둥댈 때 내놓으면 글씨나 그림 등 온갖 괴물을 잘도 그려놓곤 했었다.

6월의 마지막 날, 달력을 넘기려니 유난히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진 숫자 밑에 아버지 기일이라 적혀있었다. 또 하나의 결별이랄까. 벽에 걸린 아버지의 영정을 내리던 날처럼 울컥 밀려오는 그리움에 눈시울이 뜨겁다.
올해도 일곱 남매 중에 다섯 남매가 남동생 집에 모여 아버지의 기일을 지냈다. 어머니보다 아버지와 더 많은 세월을 보냈던 내 유년의 날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병환으로 직장을 접었던 아버지는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전주에다 가게를 내어 학비며 생활비를 마련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바뀐 셈이다. 초등학생인 나는 바로 밑의 남동생과 함께 시골집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오히려 아버지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안타까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리라. 연탄도 채 보급이 안 된 때여서 아버지의 옷자락에서는 부엌 짚불 내가 떠나지 않았다. 시골에 미장원이 없던 터라 머리를 자르려면 으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남동생과 함께 이발관으로 갔었다. 동네 이발관이라야 겨우 삐걱거리는 의자와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거울에 가위 그리고 낡아빠진 이발 기계와 식칼처럼 손잡이가 달린 면도 하나가 고작이었다. 톱날에 머리카락이 끼면 생머리를 뽑는 것처럼 아팠다.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낸답시고 싸리비만한 솔로 목덜미며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는 뚝뚝 떨어지는 비눗물을 뒤통수에 바르고 마구 면도질을 해대던 폭군 같은 이발사, 눈을 꼭 감아보지만 어찌나 따끔거렸던지 아픔을 참다못해 눈물을 찔끔거렸던 일이 왜 이리 그리운지, 뒤통수를 만져보았다. 또 학교에서 만들어오라는 것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빗자루와 걸레며 신발주머니 심지어 오자미까지도 만들어 주셨던 아버지가 자꾸만 어른거린다.

어둑어둑 하교 길이 늦거나 눈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내 이름을 부르며 논둑길로 마중을 나오시고, 미쳐 못 챙긴 도시락을 싸들고 교실까지 찾아오셨던 아버지. 콩대나 짚불을 피워 무쇠 솥에다 통보리에 콩을 섞어 달보드레하게 볶아서 항상 책상머리맡에 간식으로 놓아주셨던 아비지. 그뿐인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장독뚜껑을 덮으랴, 마당의 곡식을 담으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허둥대시던 아버지였지만, 내 기억엔 한 번도 역정을 내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 마음인들 어찌 편하셨을까.
틈만 나면‘허탄가’라는 책을 빌려다 붓으로 마분지에 베껴 놓고 밤이면 흥얼흥얼 등잔불 밑에서 무엇인가를 만지작거리셨다. 짚으로 개집을 엮어 마루 밑에 넣어주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쏙 들어가 앉았고, 닭 둥지를 틀어 헛간 구석에 매달아 놓으면 용케도 닭은 그 속에서 알을 낳았다. 나는 알을 낳은 닭에게 아버지 몰래 밥쌀을 주고 둥지에서 꺼낸 매끄럽고도 따스한 알을 볼에 대보기도 하면서 조심스레 망태기에 담곤 하였다.

그날도 미술시간이 든 날이었다. 도화지가 없는 딸을 눈치 챈 아버지는 닭이 알을 낳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둥지에서 알을 꺼내 뒷짐 찐 손에 쥐고 점방으로 가셨다. 알사탕 한 알과 도화지 몇 장을 달걀과 맞바꿔 내 손에 꼭 쥐어주셨던 아버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달걀에 그 도화지! 나에게는 달걀이 도화지였고 도화지는 곧 하얗게 다가오는 아버지였다.
어머니 같은 아버지, 그런 아버지께서는 창포 꽃이 슬프도록 피어나던 단오 이튿날 아침, 환갑도 못 넘긴 나이에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6월 달력을 고이 접으니 하얀 종이 한 장! 하얀 종이를 보면 도화지가 생각나고 도화지를 보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내 가슴에 남긴 도화지 한 장. 나는 지금 어떤 삶을 그리고 있을까.
(2010.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