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그리운 고향의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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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는 허름하게 변해 있고, 울타리는 아주 초라하게 쓰러져 있어야만 옛집이 아름답게 보인다네. 거기에는 잔주름 같은 거미줄과 무성한 세월, 잡초들도 언제나 제 목소리보다 더 크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를 조용히 걷어내고 있으면 옛날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인다네. 그 시절의 장독대, 창문, 뒤란, 웃음소리…. 그러나 다시는 수리할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집, 눈이 내리면 더욱 그리워지는 집. 그리운 옛집. 


-김영남 '그리운 옛집' 중에서


 

구례 운조루 '타인능해'의 뒤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도연명 '귀거래사' 중에서 운조루는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다. 1776년에 당시 낙안군수이던 유이주가 지었다. 운조루가 자리한 오미동(五美洞)은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구몰니(金龜沒泥), 오보교취(五寶交聚)의 3대 진혈을 지닌 명당터로 '구만들'이라는 너른 들을 품고 있다. 유이주가 이곳에 집터를 잡을 때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지리산 자락을 휩쓸고 지난 숱한 변란 속에서도 운조루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역시 단지 명당터여서가 아니라 그 집을 지켜온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었다.


운조루의 곳간채에는 원통형의 뒤주가 놓여 있다. 이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말 그대로 '누구나 열 수 있는' 이 뒤주는 이 집의 주인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다. 쌀 세 가마니가 들어가는 이 뒤주에 쌀을 가득 채워놓고 필요한 사람들이 언제든 퍼가도록 했는데, 뒤주를 주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외진 곳에 두어 쌀을 얻으러 온 사람들이 계면쩍어 하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운조루에서는 한 해 대략 200석의 쌀을 소출했는데 어떤 때는 전체 소출량의 20%를 베풀기도 했다. 마을사람들 또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이 뒤주의 사용을 가급적 억제함으로써 집주인의 마음에 부응했다.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집인 운조루는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과 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 앞에는 연못을 파고 그 주위에 온갖 화초를 심어 계절의 변화를 담도록 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에는 특이하게 짐승의 뼈가 걸려 있다. 원래 벽사의 뜻으로 호랑이 머리뼈가 걸려 있었지만 도난을 당한 후 말 머리뼈로 대체했다고 한다. 무관이었던 유이주가 어린 시절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와 함께 이 집의 위엄을 알리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마당에서 높은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통하는 길목은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오르막길로 만들어져 있어 이 집의 옛 영화를 짐작케 한다. 사랑채의 툇마루 아래에는 옛날에 쓰던 수레바퀴가 고즈넉이 놓여 있어 무상한 세월의 흐름을 말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운조루에서 섬진강 자락을 따라 내려가면 화개장터를 지나 평사리가 나온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다. 작가는 '토지'의 무대로 평사리를 선정한 이유를 경상도 출신인 자신이 소설 속 인물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서 경상도 이외 다른 지방의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만약 작가가 경상도 이외의 다른 지방 토속어를 구사할 줄 알았더라면 '토지'의 무대는 어쩌면 운조루가 있는 토지면 오미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평사리와 최참판댁과는 또 다른 연면한 삶의 역사가 펼쳐졌으리라. 게다가 '토지면' 오미리라니(물론 '土地'면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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