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박인경
ㆍ작성일	2010-01-04 (월) 06:36

ㆍ추천: 0 ㆍ조회: 2668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박인경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말 저녁 8시, 저녁 설거지까지 마친 시간인지라 TV는 나를 붙잡는다.

상극이 될 수밖에 없는 두 집안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 중 한 가정속 등장인물 중에서 파출부 역할을 맡고 있는 중년부인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홀로 된 아버지와 두 딸이 사는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줌마의 능청스런 입담이 극의 재미를 더한다.

철없는 둘째딸을 데리고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노처녀인 첫째딸의 히스테리를 노련하게 받아 넘긴다. 큰딸이 이유 없이 트집을 잡으면 '네~ 네' 또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콧노래로 대답을 대신한다. 화장은 총천연색으로 짙고, 옷차림도 유랑극단 광대만큼이나 유치하다. 무슨 저런 역할이 있나 하고 멸시하며 보다가 시간이 흐르며 그 여인이 가진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극중에서 그녀의 과거는 파란만장하다. 몇 번의 결혼은 남자의 배신과 버림으로 끝나고, 아들은 툭 하면 사고를 저질러 이 아줌마가 합의금을 대주어야 한다. 본인이 할 수 없으면 시집 간 딸을 은행창고처럼 이용한다. 험한 세파를 겪으며 남은 것은 체념 섞인 능청뿐이다. 만약 이 여인이 자신의 인생을 비관만 했더라면 아마 폐인이 되었거나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한 자동차 광고를 보게 되었다. 광고 문구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눈이 오거나 말거나.' 평상시에도 안전하지만 눈이 와도 4륜구동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사라는 것이다. 세상살이가 삭막하다 보니 요즘 들어 이런 관조적인 표현이 유행인 모양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체념이란 단어를 배우게 되었다. 체념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이란 뜻도 있지만,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의미도 있다. 나는 이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구절이 마음에 든다.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일에도 자신이 있었다. 도전하면 모두 이루어 질 것 같았고, 그런 적이 많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욕심을 내서 이기고 싶었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조금만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발끈 화가 났었다. 거기다 이론을 앞세워 따지고 내가 만든 틀에 남편을 맞추려 아웅다웅하며 살았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세상과 부딪치며 욕망을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동적인 성향을 가진 터라 주위로부터 부탁이나 간섭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왜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나에게 이런 것들을 바라는 것일까 하며 분노하기도 했었다.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기며 타인을 설득시키지 못하면서 홀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무와 책임에는 최선을 다하되, 수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체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얼마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지하 주차장이 있다. 입구를 내려와 빈자리에 차를 세우려 비상등을 켰다. 상식적으로 주차장에서는 서행을 하는 것이 기본이고 앞차가 깜빡이등을 켜면 주차를 시작한다는 신호다. 그런데도 뒤 차가 바로 따라오며 경적을 울린다. 어쩌란 말인가. 무시하고 주차를 시작하니 차에서 내린 두 남녀가 계속 무어라 지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통질서에 위배되는 것이 없어 그대로 진행하니 그들은 지쳤는지 가버렸다. 나도 같이 내려서 시시비비를 가렸으면 서로 언짢았을 상황을 피하게 된 것이다.

오늘 밤도 드라마 속 아줌마는 체념의 능청을 부리고 있다. 나도 이제부터는 내 능력 밖의 세상 요구에 이렇게 되뇌이려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2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