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으로 손꼽히는 정조가 신도시건설을 꿈꾸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세계 최초로 계획한 신도시이자, 조선 후기 성곽 건축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이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담긴 수원 화성은 정조가 계획하고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여, 벽돌과 기중기를 사용한 우리나라 성곽 건축사상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신도시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150년 전인 조선 후기에 수원 화성을 축조한 정조는 수원부의 이름도 화성으로 고칠 정도로 애정이 깊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성곽 건축물로 가치를 인정받은 수원화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최고 길지로 여겨온 화성의 화산(花山)으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했고, 사후에 자신도 그곳에 묻혔다. 2009년 6월에는 융릉과 건릉을 비롯한 40기의 조선 왕릉과 제례의식이 수원 화성에 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겹경사를 맞았다. 게다가 올 5월 17일에는 세계 초일류기업을 지향하는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경기도 화성에 있는 세계 1위의 메모리 반도체분야 신규라인 기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올부터 12조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계획을 밝혀 세계의 경쟁업체들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바로 정조가 꿈꾸던 신도시이자, 최고의 길지로 여겼던 화성이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 셈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정조의 통찰력과 국가경영마인드에 감탄할 따름이다.
올 5월 중순, 조선 정조가 그토록 신도시건설을 꿈꾸던 화성으로 두 번째 답사를 갔다. 융릉과 건릉이 가까워 오자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의 환영이 교차하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140년 동안 두 능을 지켜온 호호백발의 향나무가 마지막 하나 남은 나뭇가지에 생명을 부지하며 손님을 맞았다. 건릉과 융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왼쪽의 울창한 숲길을 15분쯤 산책하자 정조와 효의왕후가 잠든 건릉이 눈앞에 다가왔다. 능의 관리와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둘러보고 속세와 성역을 경계하는 금천교(禁川橋)를 지나자,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다가와 발길을 옆으로 돌리라고 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는 넓은 돌이 바닥에 깔려 있는데, 약간 높은 왼쪽은 신이 다니는 길(神道)이고,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길(御道)이기 때문이다. 우회해서 올라간 정자각은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만나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이었다. 하지만 처마 옆의 나무가 썩어가고, 단청은 퇴색했다. 기둥에는 곳곳에 커다란 틈이 벌어져 있어 괜히 내가 죄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봉분이 있는 능침공간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스런 곳으로 백성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서 먼발치에서 묵념을 올리고 발길을 돌렸다.
건릉 아래에서 왼쪽 샛길로 접어들어 두 능을 구분하는 숲이 울창한 능선을 지나자 잔디가 잘 가꾸어진 융릉이 한눈에 잡혔다. 바로 정조의 부모가 묻힌 성스러운 공간이라 다가가지 못하고 망원경으로 살펴본 봉분의 인석 위에는 만개하지 못한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있었다. 한껏 피어보지도 못하고 28세에 세상을 등진 사도세자의 한을 달래려는 심오한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효성이 남달랐던 정조는 1789년 아버지의 능을 경기도 양주(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서 이곳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부에게 융성하게 보답한다.’는 의미로 현융원(顯隆園)이라했으며, 그 뒤 사도세자를 장조황제, 어머니를 현경황후로 추존하고 무덤도 융릉으로 높였다. 그 효성이 얼마나 지극했으면 부모의 능 주변 소나무에 창궐하는 송충이를 잡아서 씹어 먹었을 정도였을까. 비각에 안치된 장조황제와 현경황후의 비석이 마치 총탄을 맞은 것처럼 여러 군데가 훼손된 채 방치되고 있었다. 만약 정조가 부활해서 부모의 비석을 보았다면 기절초풍 했을 일이다. 능 아래에 있는 곤신지라는 둥근 연못도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연모하는 정조의 마음을 엿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남달랐던 정조는 언제나 옷깃을 여미는 경건한 마음으로 국운의 흥망성쇠 근본을 깨우치고자 노심초사했다. 또한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유일하게 문집을 남기고, 규장각을 설치한 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마흔아홉의 젊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옆에 묻혔다.
정조가 아버지의 극락왕생 발원을 위해 세웠다는 용주사는 건릉에서 승용차로 15분 거리였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서 화성을 잇는 도로에 의해 사찰 경내가 둘로 나누어졌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龍珠寺)로 작명했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능침사찰로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도록하기 위해 세웠다는 홍살문이 마중 나왔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겸손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가가는 사찰, 내면을 성찰하여 중생의 번뇌를 벗고 성불의 씨앗을 심게 하는 참회정진의 기도를 봉행하는 사찰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특히 정조의 효심과 불심을 계승하기 위해 효행박물관과 효행교육원을 세우고 청소년과 어른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고,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한글과 인성교육에 힘을 기우리는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정조의 얼이 서린 화성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룬 통치철학과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반면 영조는 자기 손으로 죽인 아들을 애도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 승정원 주서 이광현이 기록한 <이광현 일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궁중문학의 백미로 일컫는 <한중록>, 최근 신봉승의 저서 <성공한 왕 실패한 왕>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오늘날 존경받는 한국의 정치인과 재벌총수들을 찾아보기 어렵듯이, 조선 왕릉에 묻힌 27명의 임금 중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성군은 세종과 정조, 그리고 태종, 성종, 선조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아들을 죽인 영조, 단종의 목숨을 빼앗은 세조, 패덕한 광해군, 폐왕이 된 연산군, 반정으로 옹립한 중종, 적장에게 머리 숙인 인조 등 국정난맥을 초래한 임금들이 부지기수다. 또한 왕세자에 책봉됐으면서도 보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뒤주왕자’란 불명예를 얻은 사도세자나, 망국의 한을 짊어진 고종 같은 불행한 왕도 있다.
아무래도 정조는 자기의 얼이 서린 화성의 문화유산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나에게 조선 제왕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에서 오늘의 경영철학을 배워서 제2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라는 계시를 주는 듯했다.
(201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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