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날, 몽글몽글 불타는 조그마한 모닥불 앞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살을 에는 차가움에 코끝이 빨개지고 파랗게 시린 입술사이로 하얀 입김이 연신 토해져 나온다. 두툼한 옷을 몇 겹으로 끼워 입었어도 차가운 칼바람의 한기는 피할 수 없는가 보다. 타오르는 모닥불의 온기로 서로의 따뜻한 정을 나누며 무엇이 즐거운지 사람들이 연신 깔깔댄다. 이글거리는 숯불 위에 올려놓은 고구마가 때를 놓쳐 시커멓게 탄 검댕이가 되고, 그 옆으로 엉덩이가 뜨거운 밤톨들이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람에 실린 구수한 군고구마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며 기웃거린다. 모닥불은 언제나 우리에게 정겨운 추억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이고, 잠시나마 삶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는 따뜻한 친구이다.
모닥불 옆으로 마대자루 하나가 배를 불룩 내민 채 조용히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땔감나무로 가득했다. 옹이가 박혀 쓸모없거나 목기를 만들다 쪼개져서 버려진 손바닥 두 개 넓이의 물푸레나무 폐목이다. 쓰임이 다한 놈들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따뜻함을 전해주며 그들의 생을 마감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예로부터 남원은 목기의 고장이다. 골목마다 나무 깎는 소리가 요란하고, 광한루 주변으로는 목기를 파는 가게들로 즐비하다. 목기 덕에 그들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으며 자식들 교육도 가능한 것이다. 그 목기의 재료가 되는 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다. 껍질을 벗겨 담가두면 물이 푸르게 변한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고 한다. 목질이 단단하고 질겨서 목기 재목으로 안성맞춤인 물푸레나무는 지리산 계곡에서 많이 자생한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물푸레나무는 등산객들에게 짙은 녹음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이파리로 뿜어내는 맑은 공기는 그들의 답답한 가슴을 쓸어준다. 껍질을 벗겨 달인 물은 결막염 등 눈병을 앓는 이의 시름을 달래주고, 가지를 잘게 썰어 달인 물은 통풍치료에 특효라고 한다. 갖가지 이로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이들이 수십 년을 자라 몸통의 두께가 허벅지만해지는 늦가을, 잘 생긴 놈들은 나무꾼의 톱질로 베어지며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놈들은 죽어도 죽지 않고 또 다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
베어진 나무는 마당에 쌓인 채 말려지며 목기장이의 간택을 기다린다. 마디가 실하고 옹이가 없는 잘생긴 부분은 적당한 크기로 잘려지고, 깎이고, 다듬어진 다음 옻칠로 몸단장을 마친다. 목기가 되는 것이다. 발우로 태어나 산사 선승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제기로 태어나 잠시 후손을 찾는 영혼들의 배를 불려준다. 선택받은 놈들의 화려한 부활이다.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승자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패자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목기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버려지는 안타까운 놈들이 즐비하다. 옹이가 박혀 처음부터 버려지는 쓸모없는 놈, 목기장이가 잠깐 방심하는 동안 상처가 깊이 파인 불우한 놈, 간택은 받았으나 마르는 도중에 쪼개지는 안타까운 놈. 이들은 공방 한 모퉁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서 무덤처럼 쌓인 뒤 오가는 발길에 차이는 기구한 운명이 된다. 새 생명을 얻었으나 패자가 된 것이다. 추위가 물러난 늦은 봄부터 더위가 꺾이지 않은 초가을까지 새로운 패자는 앞서 버려진 놈들 위로 마구 던져지고 쌓여져 그들의 무덤을 높여간다. 맨몸으로 비를 맞고 내리쬐는 햇살에 그을리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인생의 패자들이 모인 집단수용소의 처절한 모습 같다.
험난한 세상, 그래도 우리가 참고 살아가는 것은 패자부활전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기로 태어나지 못한 패자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고 대우가 달라지는 때가 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가을이면 천덕꾸러기들에게도 따뜻한 시선들이 구애를 보낸다. 땔감으로서 일생을 마감하기 위해 적당한 몸값에 이곳저곳으로 팔려간다. 일부는 모닥불 속에서 마지막 육신을 불태우며 생을 마감한다. 따뜻한 온기로 시린 마음을 달래주고 아련한 추억의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놈들은 아궁이로 발길을 향한다. 패자로 살았던 한 많은 세월을 모두 불사르며 가마솥을 달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불태우며 아랫목을 데운다. 남은 미련 없도록 뜨겁게 뜨겁게 불타오른다. 자신을 불태우고 뜨거움을 토하며 놈들도 쓸모 있는 몸이라고 마지막 항변을 하며 사그라진다. 어느 것 하나 버려진 채 끝나는 의미 없는 삶은 없는가 보다. 다 태워버리려 했지만, 다 흩어버리고 떠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는지 놈들은 흔적을 남긴다. 타고 남은 재다. 재는 밭에 뿌려져 푸성귀들의 먹이가 되고, 선승들의 옷자락을 푸르스름한 잿빛으로 물들이며 생을 완전히 마감한다. 마지막 타고 남은 영혼까지도 다 주고 떠난다. 잠시 소풍으로 온 세상, 잘 놀다 가는 것처럼 훌훌 털어버리고 떠난다.
나는 떠나는 재를 다 보내주지 못했다. 한 줌을 내 곁에 붙잡아두고 놓아주지 않았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살신성인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물푸레나무, 놈의 마지막 흔적인 재. 나는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그 재를 고운 체로 내려 흙물에 풀고 분을 만들어 초벌을 한 기물 표면에 곱게 입혔다. 도자기의 유약이다. 놈이 입혀진 기물을 이글거리는 뜨거운 가마 속에 들여놓고 하루를 달구고 또 하루를 식혀 꺼냈다. 황갈색의 고귀한 도자기가 탄생했다. 나는 놈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었다. 천 년의 생명을 주었다. 주기만 했던 놈을 그냥 떠나보낼 수 없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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