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주로 되돌아 왔다. 다시는 전주 서학동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떠난 지 3년 반 만에 다시 돌아와 버렸다. 떠날 당시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고만장했었다. 서운해서 잠시 눈물도 보였지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얼마나 들떴던가. 그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해진다.
오늘은 전주로 이사 가는 날이다. 이삿짐센터와 8시에 약속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이번이 두 번째 이사다. 결혼 전에는 이사를 해 본 적이 없고, 첫 번째 이사는 같은 아파트 바로 앞 동으로 이사했기에 별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전주로 갈 것이고 아마 다시 군산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감정이 앞서 눈물을 흘리겠지만, 바빠서 그럴 틈이 없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이삿짐을 나르는 동안 남편과 나는 아침을 먹으러 갔다. 집 근처에 있는 콩나물 국밥집이었는데, 은파 유원지로 아침운동을 나갔다가 종종 들르던 집이었다. 이젠 오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니 왜 이리 서운한지, 곳곳에서 환상처럼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남편과 다툰 날, 우울한 마음에 무작정 걷던 은파 유원지를 비롯해 길 하나하나에 슬펐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아침을 먹고서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니 사다리차로 이삿짐이 하나 둘 내려지고 있었다. 3년 반 동안의 세월의 무게가 제법 느껴졌다. 3년 반 전, 부모님 품을 떠나 독립했고 소꿉장난 같지만 남편과 내가 꾸민 세계에서 여왕 노릇을 했다.
‘우리의 왕국’ 에서는 성공한 정책과 실패한 정책도 있었다. 성공한 정책으로는 서로 사랑하며 살림을 꾸미고 산 것, 또 내 꿈을 이루겠다고 수필공부를 해서 내 꿈을 이룬 것, 3,4년 안에 집을 장만하자는 꿈도 이루었다. 주변의 도움과 빚 없이 우리의 힘으로 집을 마련하자던 계획이 이루어져 더욱 흐뭇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시, 실패한 정책도 있었으니 바로 건강을 잃었다는 점이다. 건강이 사라지면 아무리 다른 정책이 성공했더라도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 정책은 ‘건강 되찾기’로 정하고 그 꿈을 이루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이삿짐 내리는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삿짐 차가 먼저 출발하고, 그 뒤를 따르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가 흘러 나왔다. 난 가수 김광석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특히 이 노래는 별 감동 없이 들었었다. 20대엔 이 노래를 들으며
“겨우 서른 살밖에 안 되어서 무슨 철학을 알까? 서른이면 한창 좋을 나이인데……”
했었다. 나의 서른도 직장을 다니거나 연애를 하느라 정신없이 흐를 줄만 알았다. 지금 내 나이 서른 셋!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어울리는 나이다. 20대 후반쯤에 내 친구들은 이 노래가 너무 맘에 와 닿는다고 했었다. 그때의 난 그 친구들이 청승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사하는 날 아침에 들은 그 노랫말의 한 부분은 꼭 나에게 들려주려는 듯 마음에 와 닿았다.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몇 년 전부터 난 이별을 하나둘씩 겪고 있다. 오늘은 군산과 이별하는 날이다. 내 추억이 어린 이곳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전주에서의 새로운 삶이 날 기다리고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별은 힘들다.
이사 하는 날 아침, 난 ‘이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제까지 마주했던 사람과 사물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잘 해 줄 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나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고,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 여기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이효석의 소설 ‘돈(豚)’ 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돼지가 기찻길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은 듯하지만, 난 이별을 겪을 때마다 그 소설의 그 장면이 떠오른다. 세상의 이별은 거의가 그렇게 허무하게, 눈 깜짝할 새 이루어져 마음이 아프다.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해버렸다. 오늘은 군산을 떠나 전주로 이사 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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