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의 대표적인 산이라면 부소산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해발 백여 미터 남짓한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수호하려고 축조한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많은 사적지와 문화재가 이 안에 산재해 있다.
나는 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부소산에 간다. 그곳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평일에 찾기엔 시간적 부담이 크다. 그래서 주말부부처럼 한가로운 휴일에만 특별히 찾는다.
인근의 여타 산과는 달리 깨끗하게 포장된 산책길을 따라 오롯이 걷다보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노폐물들이 말끔히 씻겨 나가 정화된 나 자신을 보는 듯하다.
오뉴월의 아침 햇살이 숲의 신록들을 진한 연두색으로 덧칠하고 있다. 백마강에서 발원하여 암벽을 거슬러 올라온 강바람이 내 몸 깊숙이 파고든다. 기분 좋은 휴일이다.
부소산 들머리에 서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푸른 숲이다.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아카시아나무들이 올망졸망 한데 어우러져 있다. 먼저 길섶에 즐비한 복자기 나무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매끈한 줄기와 좁지도 넓지도 않은 단아한 세 이파리가 내 팔을 두드린다. 유혹에 못 이기는 척 가지에 팔도 걸어보고 나뭇잎을 어루만져 보기도 하며 입도 맞춰보곤 한다.
숲 향기 속으로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기면 지금도 탄화미(炭化米)가 나온다는 군창지가 허리춤 사이로 보이고, 그 건너편에는 구불구불한 나성(羅城)이 짙은 사인펜 자국처럼 남아 있다.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산허리를 한 바퀴 휘감으며 쌓아 놓은 흙과 돌의 산성이다. 넓고 평평한 포도를 밀쳐내고 비좁고 가파른 산길을 고집하는 새벽 사람들의 성화에 노면은 비갠 후의 지렁이 자국처럼 또렷하기만 하다.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이면 네거리에 이른다. 동으로는 궁녀사, 서로는 부소산 후문, 그리고 북쪽으로는 낙화암과 고란사로 향하는 네 갈래 길이다. 거기서 더 가면 사자루와 낙화암으로 가는 낮은 고개가 나오고, 그 고개를 넘어 이십여 발자국을 보태면 연리지 소나무가 있다는 안내판이 오가는 이의 눈길을 끈다. 근 백여 년은 됨직한 커다란 나무줄기가 가지부분에서 하나로 연결된 나무다. 비록 그것이 그 형체를 갖추는 데는 그의 나이만큼 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에 사람들의 눈에 띄었는지 그 녀석 앞에 세워둔 표지판이 되레 호사스럽기만 하다.
원래 연리지(連理枝)란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희귀한 현상을 말한다. 특이한 모양새로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는 당 현종과 뜨거운 사랑을 읊은 시 ‘장한가(長恨歌)’중에서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하여 연리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하여튼 이 산자락에 있는 소나무를 연리지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뿌리가 같은, 한 몸통에서 두 개의 줄기가 뻗어 나와 서로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돌연변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지난해 여름, 이 안내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오십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우연히 연리지를 꼭 닮은 한 쌍의 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동안 그 녀석들 곁을 수십 번은 지나갔을 것임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몸통 둘레가 아이의 팔로 한 아름이나 될 성싶은 참나무에 한 치쯤 되는 단풍나무가 엉겨 붙은 것이 마치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은근히 심통이 나서 단풍나무를 손으로 밀쳐보았더니 완전히 붙지 않았는지 틈새가 보이고 움직임이 있었다. 거북이 등처럼 단단한 참나무껍질 때문에 단풍나무 줄기가 제대로 붙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 우두커니 그들을 지켜봤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껴안고 얼러보려 애써보지만 무딘 창으로 솥뚜껑처럼 단단한 방패를 뚫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웠을 터.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수액을 나누고자 교접을 시도했건만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옹이 진 단풍나무에서 내 지난 삶의 매듭을 보는 듯 가슴이 짠했다.
그러면서도 문득, 옛날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면서도 정절을 지킨 한 궁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옹골진 참나무에서 백제인의 기백이 묻어나고, 뱀과 같은 단풍나무에서는 나당연합군 의 변덕스러움과 치졸함이 엿보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수백의 군사가 성안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창칼을 휘둘러도, ‘적의 손에 의해 죽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모습으로 암벽에서 한 송이 꽃이 된 선녀가 이 산기슭에서 되살아난 듯했다.
며칠 뒤 사적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나무줄기가 맞대고 있는 부분의 껍질을 벗겨내어 약을 바르고 끈으로 묶어 접을 붙여 주자는 건의였다. 그래서 접목이 성공하여 그 녀석들이 잘 자란다면 지역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면 낙화암 버금가는 명소가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이 언덕을 지날 때마다 녀석들을 보노라면 불쌍하고 안쓰러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녀석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고 가슴에 뭔가 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려 외면하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먼 곳으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번쩍이는 묘안이 어느 날 내 뇌리에서 번쩍였다. 그 녀석들을 결혼시키는 것 즉 ‘접을 붙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녀석들이 몸을 한데 섞으면 견우가 직녀를 만난 듯 행복한 나무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서 언제라도 마음 편히 그곳을 찾을 수 있고, 늦은 밤 휘영청 밝은 달이 내 창안으로 찾아오더라도 마음껏 귀잠을 청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30여 년 전, ‘첫사랑에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던 도수 높은 안경을 쓴 국어선생님의 말씀이 아파트 화단의 단풍나무가지 끝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2010.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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