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나면 반드시 이삼십 분은 산책을 한다. 자연을 접하며 계절감을 익히고 식곤증을 쫒기 위함이다. 만추라서인지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니 잡초들도 뒤질세라 점점이 핀 꽃을 내밀며 나와 시선을 끈다. 배부른 사마귀는 풀잎에서 시소를 타고 그 위로는 고추잠자리가 무리지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날개를 반쯤 내린 채 풀잎이며 나뭇가지 등에 앉아 있는 녀석들이 있으나 대부분은 하늘을 날고 있다. 대낮인데도 암수가 뒤엉켜 하트형 자세로 교미하는 배짱 좋은 녀석들도 있다.
‘높고 푸른 하늘, 조각구름, 단풍, 빨갛고 노란 잘 익은 과일, 코스모스, 국화, 시와 외로움 그리고 고추잠자리’, 가을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산책길에서 만나는 고추잠자리만큼 그동안 묻혀 있던 추억들을 새록새록 생각나게 하고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머리의 반을 차지하는 큰 눈, 얇고 투명한 날개, 날씬한 몸매를 가진 잠자리는 앞날개와 뒷날개를 따로 움직이며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는 뛰어난 비행기술을 갖고 있다. 잠자리는 4장의 무지갯빛 날개, 보석으로 아로 새긴 것 같은 아름다운 겹눈을 가지고 있으며, 강한 날개로 힘차게 날개치면서 시속 50km의 속도로 300km정도를 날 수 있다. 나는 모습을 보노라니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 직선으로 빠르게 비행하다가 상하로 쭉 뻗어 올라가는 잠자리. “두두두두” 귀청을 터지게 할 만한 소음을 내는 헬리콥터와는 달리 어떠한 작은 소리조차도 내지 않고 착륙이 자유롭고 비행속도나 자유회전, 사방을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진 잠자리의 비행술은 국방기술이 아무리 첨단이라 해도 따라 올 수 없을 것 같다. 잠자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미지만큼이나 이로운 곤충이다. 유충일 때는 물에서 살며 모기 등의 유충을 잡아먹고, 성충이 되어서는 파리와 모기, 각다귀, 나비 같은 곤충들을 사냥하는 잠자리는 놀라운 사냥꾼이다.
고추잠자리는 흰구름과 높고 파란 하늘이 잘 어우러진 자연의 아름다운 무대에서 새색시마냥 붉은 치마 곱게 차려 입고 날개에 빨간 리본을 달고 곡예비행을 한다. 잘 익은 고추마냥 빨간 고추잠자리도 얼굴까지 빨개졌다. 꼬랑지를 꾹 짜면 고추장이 나올 것만 같다. 아니 짜낸 물감으로 파란하늘에 빨갛게 색칠하면 정말 멋진 가을하늘이 될 것 같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면 왠지 잡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뒤로 다가가서 꼬리를 잡았을 때의 그 쾌감, 꼬리를 말아 손을 물려는 그 앙증맞은 모습을 보기 위함이다. 어렸을 때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잠자리 날개를 끼고 다니기도 하고 잠자리 꼬리 끝 부분을 떼어내고 나뭇가지나 풀잎을 끼워 날려 보내곤 했었다. 나뭇가지 등을 꼬리에 끼워 날려 보냈을 때, 비틀비틀 날아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릴 적에는 잠자리가 많았고 특별한 놀이가 부족했던 터라 놀이삼아 그리했었다. 그래서일까. 예나 지금이나 고추잠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시인이라면, 아니 굳이 시인이 아닐지라도 고추잠자리를 보면 시 한 편은 생각날 것이다.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풋내기 시인이지만 고추잠자리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시상을 잠재울 수가 없다. 고추잠자리란 녀석은 모습자체가 약간 우스꽝스럽고 날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편안해 보여서인지 어느덧 어릴 적 추억에 빠져들어 동화 속 나라를 날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도 동시 같고 재미있게 묘사된다.
꽃구름 하늘이고 빙빙 도는 고추잠자리 / 동네 귀염둥이 삽살개 꽁무니 쫓아가다 전봇대에 부딪치고 / 그늘 찾아가는 누렁이 뒤따라가다 꼬리에 한 대 얻어맞는다 / 빨갛게 잘 익은 고추위에 앉아 졸다 아낙 손길에 채이고 / 마실 나서는 할아버지보다 앞서려다 지팡이에 맞아 눈 뛰어 나온다 / 도회지에서 피서 온 처자 바라보다 눈총 맞고 부끄러워 벌겋게 달아오른 고추잠자리 / 황금벌판 꿈같은 비행 그리며 꼬마 녀석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 (자작시 2010.8.7)
조금 더 높아진 파란 하늘가에 솜털구름 걷어차며 암수 서로 꼬리 물고 빙그르르 빙그르르 돌며 무얼하길래 눈만 휑한 고추잠자리 / 나무 끝에 앉아 지쳐가는 여름 토닥거리던 고추잠자리는 흰둥이 따라 온종일 빙빙 도는 꼬마걸음 앞서 종종대고 졸린 왕 눈 껌벅 거리다가 뒤에서 꼬리 살짝 잡으려니 저 만치 달아난다 / 고추잠자리가 늘어 가면 여름방학이 끝나 가는데 아들 녀석 방학숙제가 걱정되고 한 달여의 생활을 며칠 내에 끝낼 일기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난다/ 우리 할매 연옥색 모시적삼 사이로 한 여름 지나가고 / 고추잠자리 하늘 가득 날아들면 / 하늬바람 불어오고 / 곡식이 여물어져 풍성한 가을을 맞이한다는데 / 이번 가을 풍성함으로 가득 차서 풍요로운 한가위 되려나. (자작시 2009.8.14)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힘들게 깔딱고개를 넘어 정상에 도착하자 고추잠자리가 빨갛게 뒤덮은 모습을 보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리 많은 고추잠자리 떼를 본 적이 없었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은 고추잠자리가 그 높은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 왔으며 왜 하필 정상에 몰려 있을까? 환경오염으로 설자리가 좁아진 고추잠자리들이 청정자연을 찾아 등산을 나온 모양이다.
서울시에서는 환경오염으로 고추잠자리 객체수가 줄어들자 ‘서울시 보호 야생동식물로 지정’하여 잡다가 단속반에 걸리면 벌금 100만원을 부과한단다. 물론 대기오염이 최악인 서울만의 이야기일 수 도 있으나 요즘 들어서는 시골에서도 예전만큼의 고추잠자리 무리를 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전체적인 환경이 변했을 수도 있다.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 고추잠자리를 볼 수 없을 때가 올 거라 생각하니 ㅇ쩐지 마음이 찹찹해진다.
▣ 잠자리는 고생대 석탄기(약3억2천5백만 년 전)에 출현한 지구상에서 날개를 가진 곤충으로 진화한 무리 중 최초의 곤충으로 지구환경에 따라 그 크기만 작아졌을 뿐이지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완전개체이다. 원시잠자리는 날개 하나의 크기가 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추정된다. 불완전변태를 하는 외시류로서 날개를 가진 곤충 중에서도 배 위에 날개를 접을 수 없는 고시류에 속한다.
전 세계적으로 5천여 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물잠자리, 실잠자리, 왕잠자리, 장수잠자리, 밀잠자리, 뱀잠자리, 뿔잠자리, 나비잠자리, 된장잠자리, 고추잠자리 등 125종의 잠자리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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