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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김소영
ㆍ작성일	2010-11-12 (금)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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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이 되어라
천리향이 되어라
-뒤늦게 쓴 육아 일기 : 딸 이야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김소영

“엄마, 기신 꼬깔로야!”
마법의 주문처럼 내 안에서 떠오르기만 하면 웃음과 함께 눈시울이 핑 도는 말이다.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으면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말들을 종알거릴 때였다. 눈앞에 보이던 물건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까르르 웃으면서 내뱉었다. 바쁘게 일하는 엄마대신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동네 할머니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배운 말이었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누군가 설명해 준 사람도 없었을 텐데 아이는 혼자서 배워서 쓰고 있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또 듣고 싶은 욕심에 몇 번씩 물건을 감추었다 보여주면서 그 말을 유도했지만 아이는 이내 입을 꼭 다물었다.

내 첫째아들은 유난히 예민하고 잠이 없었다. 나는 신생아들이 하루에 16시간 이상 잠을 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할 사람을 찾는다면 나는 제일 먼저 뛰어가서 맞장구를 칠 것이다. 낮잠도 밤잠도 없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안아주고 업어달라고 보챘다. 잠 못 드는 아이를 데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어본 적이 많았다. 겨우 낮잠을 재우고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면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소리에 아이는 깨어나곤 했다. 밤에 업힌 아이를 어르며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장롱의 문을 열어 쌓아놓은 이불에 몸을 기대고 서서 버티곤 했었다. 곤하게 잠들어있는 남편의 모습이 얼마나 부럽고 야속했던가.

그렇게 호되게 엄마가 되는 훈련을 받다가 순둥이 딸을 낳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울지도 않고 잘 놀았다. 모유를 먹였는데 열흘이 넘도록 변을 보지 않아 병원에 가서 관장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몸 안에는 변이 없었다. 완전소화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분유를 먹이지 않으니 젖병을 씻어 삶아야 하는 번거로운 일조차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키웠든가 특별한 기억이 없을 정도로 아이는 순하게 자랐다.

딸아이가 세 살을 갓 넘겼을 때, 큰아이를 낳으면서 중단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친정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아이들을 맡기고 일하기로 했다. 가계에도 보탬이 되고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을 서둘러 시작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마라는 옛말이 있으나 고맙게도 남편은 내 결정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친정 동네에 조그마한 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은 직장까지 자동차로 30여분 걸리는 통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큰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녔고 할머니가 집안일을 챙기는 동안 딸아이는 주로 혼자 놀았다. 간혹 동네 할머니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하루에 한두 번씩 할머니의 등에 업혀 엄마를 보러왔다. 보채지도 않고 방긋방긋 웃어주다가도 저녁에 만나자는 엄마의 설명에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팔을 뻗어 엄마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예쁘게 손을 흔들며 아이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이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한 건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면서부터였다. 딸아이는 말수가 적었고 울지도 않았다. 소리 내어 웃는 일도 거의 없었다. 손가락을 다쳐서 몇 바늘 꿰맬 때조차 의사 선생님의 처치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재롱을 부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재롱잔치에서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들 틈에 서서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내 눈에는 내 아이만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린아이 같지 않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부모와 가족들의 박수와 탄성과 환호 속에 서 아이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외로울까봐 걱정되었다. 무대로 나가 옆에 서서 손을 잡고 같이 있어주고 싶었다. 아이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또래들끼리의 수다조차도 즐겁지 않았던 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아렸다. 돌아온 아이를 꼭 안고 그래도 참 잘했다고 다독여 주었다. 문득 내 아이가 참 강하다는 생각을 했다. 놀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으니 됐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눈에 띄게 쾌활하고 수다스러운 오빠와 남동생의 틈에서 자라서일까. 내성적인 딸아이는 치마도 입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온갖 것들을 조건으로 들이대도 아이는 끄떡도 하지 않고 치마입기를 거절했다. 바쁘게 일만 하느라 딸아이를 예쁘게 단장해 주지 못한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입던 옷을 당연하게 물려 입힌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물론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마음을 나누며 편지를 주고받던 동네 친구 한 명은 4학년 때 익산으로 전학을 가 버렸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전주로 이사를 했다.

전학 후에 아이는 더 조용해졌다. 그동안 학원을 정리하고 다른 학원에 나가 오전부터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자주 들러 상담을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소리 없이 자라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등교 첫 날 아이가 치마바지로 된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남편은 출근도 늦추고 대기하다가 사진을 찍어댔다. 딸아이를 수다쟁이로 만들어 보려는 남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무덤덤한 아이 옆에서 끊임없이 장난을 치고 졸라대며 아이를 건드렸다. 어른과 아이가 뒤바뀐 모양새였다.

1학년 내내 아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친구도 없이 학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학교에 가기 싫어. 친구가 없어. 못 사귀겠어."라고 청천 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아이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지 않는 아이여서 더 걱정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학교에 가거든 짝꿍에게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해 보라고 했다. 아이가 등교할 땐 같이 나갔다. 아파트 입구에 있던 편의점에서 초콜릿과 캬라멜을 사 주며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들여다보면 아이의 책상 위에 초콜릿과 캬라멜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느 날엔 점심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어서 급식 실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나 걱정이 되어 점심시간에 교실에 가 본 적이 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점심식사를 한 뒤에 끼리끼리 운동장에 모여 먼지를 일으키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혼자서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네댓 명의 남학생들만 몸싸움을 하며 장난치고 있는 교실 한 곳에 아이는 돌부처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밖으로 불러내어 손 안에 또 초콜릿을 쥐어주었다. 다행히 점심은 먹었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잘했다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눈물이 났지만 꾹 참고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동물원에 가야하는 소풍날이나 개별적으로 모여 단체로 공연을 보는 날에는 더욱더 걱정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나가 같은 학교 아이들이 보이면 함께 묶어서 택시를 태워서 보내주곤 했다. 딸아이는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일에 자신이 없는 듯했다. 가슴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해 주었다. 혼자 있는 게 훨씬 더 편안한 사람도 많다고 했다. 언젠가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가 생길 거라고 애써 태연하게 모른 척했다.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이가 조금씩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누가 말을 걸어왔는지 누구랑 점심을 함께 먹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여전히 조용하고 표정은 담담했지만 훨씬 밝아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아이는 세상으로 통하는 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었다. 더불어 내 마음의 짐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는 매번 시험을 망친 것 때문에 심하게 혼을 내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면 그렇잖아도 말이 없는 아이가 마음을 더 굳게 닫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에 혼자서 엉엉 울며 자책하곤 했었다.

아이가 밝아진 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울 정도로 ‘예쁜이,’ ‘공주,’ ‘사랑해’를 입에 달고 사는 남편의 지극한 노력 탓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명절만 되면 7남매의 온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어머니에게 장난스러운 타박을 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일곱씩이나 낳으면서 우리 딸 같이 예쁜 딸 하나를 못 만들었느냐’며 큰 소리를 친다. 아이들의 고모인 여동생에게 시도 때도 없이 묻는다. "넌 이렇게 예쁜 딸 본 적 있니?"

이제 딸아이는 아침에 밥은 못 먹어도 머리는 감고 말려야하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간혹 친구들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느라 잠도 설친다. 잘 자라며 뽀뽀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빠에게는 눈을 흘기면서도 마지못해 쪽 소리를 내준다. 같은 학교 고등학교 3학년인 오빠에게 친구들이 좋아하는 오빠 친구들 얘기며 가수들의 신곡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엄마의 잔소리도 기꺼이 감수하는 철부지가 되었다. 학교 선생님들의 흉내를 내며 온 가족을 웃게 만들기도 한다. 시험을 망치고 나면 ‘다음에 잘 보면 되지.’ 라며 엄마의 입을 미리 단속할 줄도 안다. 밖에 나가면 여전히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이제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늦게 맺혀서 아직은 피지 않은 작은 봉오리 같지만 딸아이를 보며 친정 집 화단에 피어나는 천리향을 떠올리곤 한다. 긴 겨울이 지나고 새봄에 피어나 그 향을 천리까지 전한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 했다. 언젠가 딸아이가 천리향처럼 작지만 화사하게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세상을 행복하게 해 주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달콤한 사랑’이란 꽃말을 가졌으니 예쁜 사랑도 할 줄 아는 따뜻하고 고운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