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최동영
ㆍ작성일	2010-11-26 (금) 06:01

ㆍ추천: 0 ㆍ조회: 2859

추억속의 장밧뜰과 핑경소리
추억속의 장밧뜰과 핑경소리
전북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최동명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다. 농촌학교 수업시간은 오전 수업이거나 오후 수업을 하여도 1시간 정도 수업하면 끝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과 필통을 책보에 둘둘 말아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 집으로 달리면 여러 아이들이 내는 필통소리, 도시락속의 젓가락 소리가 요란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왜 그렇게 다들 집으로 달렸는지 모르겠다. 여름방학이나 농한기 학교가 파한 뒤에 동네 아이들이 하는 일은 주로 소에게 풀을 뜯기는 일과 망태를 메고 들에 나가 풀을 베는 일이었다. 소가 있는 집 아이들은 소를 몰고 동네에서 3km 정도 떨어진'장밧뜰'이라는 곳으로 가서 소에게 풀을 뜯기는 일을 하였다.

'장밧뜰'은 강 하구의 삼각주 같은 형태의 벌판이었다. 지금은 어떤 사람이 하천을 불하받아 논 100마지기 정도를 개간했다고 하니 그 땅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는 소들이 좋아하는 온갖 종류의 풀들이 많았고 우리들이 놀 수 있는 널따란 모래밭이 있었다. 들판의 곳곳에는 움푹 꺼진 곳이 많아 소나무가지와 풀을 얹고 움막을 만들어 따가운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쉼터요, 동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소식통이었다. 머리가 큰 녀석들은 꼬마들의 거시기를 세워놓고 낄낄거리는 장소였다.
‘장밧뜰’모래밭에서 하는 배구나 징 짓기 게임은 너무 재미있어 여름 오후시간이 짧기만 했었다. 아이들이 게임에 몰입한 동안 소들은 방목상태로 넓은 들판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풀들로 마음껏 배를 채웠다.
여기에 나온 소들은 거의가 암소였다. 농촌에서 일을 시키거나 새끼를 낳아 생활에 보태야 했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거의가 암소를 길렀었다. 순한 암소여서 아이들은 소를 방목하고 마음껏 놀 수 있었고, 소를 타는 등 이곳만의 문화가 있었다.

'장밧뜰'에 나온 아이들은 언제부터 그랬는지 소를 타는데 익숙하였다. 대개는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갈 때 소를 타고 갔다. 소를 타기 위해서는 길들이기가 필요했다. 새로 우(牛)시장에서 사온 소가 있으면 우리는‘신참내기 길들이기’라는 의식을 행했다. 냇가 모래 자갈밭으로 흐르는 물이 고여 큰 소(沼)가 형성된 곳에 신참 소를 몰아넣는다. 아이들이 벌떼처럼 소에 달라붙어 소와 함께 수영을 하는 것이다. 물에서 나온 소는 그 뒤부터는 고분고분했다. 만약 길들이기를 거친 소가 주인 아이 태우기를 거부하면 우리는 훈련이 덜 되었다면서 다시 물속에 밀어 넣고 같은 과정을 되풀이 했다.

해가 서쪽 산에 걸리면 아이들은 서둘러 자기들이 할 일을 챙기기 시작한다. 모깃불을 피우려고 쑥과에 속하는 풀을 꺾는 아이, 베어 놓은 풀을 망태에 담는 아이, 모래밭에 묻힌 신발을 찾는 아이 등 각자 집에 돌아갈 준비에 바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자기 집 소를 찾는 일이었다. 제멋대로 마음껏 풀을 뜯어먹은 소는‘장밧뜰’내에서 찾을 수 있지만 호기심이 많은 사람처럼 특이한 풀을 식도락하고 싶은 소는 하천을 건너가는 소가 종종 있었다.
하천을 건너면 깊은 골짜기와 숲이 있었다. 골짜기 물가에 많이 있는‘우동’이라는 풀은 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 풀에 맛들인 소는 하천을 건너 숲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지금은 88고속도로가 개설되고 주변이 개발되면서 숲의 기능을 많이 상실했지만 그때 이 숲속은 우리들에게는 무서운 곳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밤에 이곳을 차로 지나가면 어릴 적 기억 때문에 머리가 쭈볏쭈볏해지는 곳이다.
당시 마을에서 총각이나 처녀가 죽은 사람이 있으면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이 숲 속 길에다 묻어버리곤 하였다. 비가 온 뒤에 이곳은 사람 크기만큼 땅이 꺼져 있곤 하였다. 또한 이 숲 뒤에는 어린이가 죽으면 묻어둔 아장(兒葬)이 있어 날씨가 흐린 초저녁 무렵에는 어린이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해질 무렵 마음은 급한데 소가 이 숲속으로 들어갔다면 우리들은 숲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집 소를 찾아와야 하기 때문에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숲속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자기 집 소의 핑경(워낭)소리를 듣고 소를 찾곤 하였다. 핑경은 소의 목에 채워둔 쇠로 만든 방울이다. 그 당시 소는 농촌에서 귀한 재산이었기 때문에 목에 핑경을 달았다. 여러 소들이 흩어져 풀을 뜯지만 소마다 독특하게 내는 핑경 소리는 소와 아이들이 교감하는 둘만 아는 신호였다.

자기 집 소들을 끌고 와서는 낮에 풀밭에서 소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 주었다. 진드기는 작은 팥알만 한 것에서부터 검은 콩만 한 것도 있었다. 이 시간은 소들이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난 뒤 모기풀을 소등 양쪽에 걸치고 소를 탄다. 인디언처럼 푸대 종이나 뜯은 풀로 안장을 만들어 타고 가는 것이었다. 집에 갈 때 아이들은 절대 소를 재촉하지 않았다. 새끼를 배었거나 풀을 많이 뜯어 배가 빵빵할 때 뛰면 아플 수 있다는 배려에서 우리들은 구릿빛 어깨를 내놓고 천천히 끄덕 끄덕 일렬로 동네로 들어갔다. 석양 무렵 일렬로 50여 마리의 소가 핑경 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을 태우고 동네로 들어가는 모습은 이 동네만의 아주 멋진 구경거리였다
시골 저녁은 가족이 한데 모여 낮에‘장밧뜰’에서 뜯어온 풀로 모깃불을 피우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 가족들이 옥수수를 뜯으며 낮의 노곤함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모깃불이 잦아들 무렵 여름밤의 적막 속에서 가끔 들려오는 소의 핑경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나에게는 부하가 둘이 있었다. 메리라는 이름의 개와 우리 집 소였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내가 소를 타고‘장밧뜰’로 갈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집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아침에 들에다 소를 매놓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장밧뜰’로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먹이는 것이 일과였다. 메리는 집에 남의 돼지나 닭이 들어오면 쫓아내고 사람이 오면 나에게 알려주는 영특한 개였다. 나를 따라서‘장밧뜰’에 데리고 가면 소를 감시한다고 소와 신경전을 벌이는 통에 가급적 메리는‘장밧뜰’에 데려가지 않았다. 이 둘은 나의 어렸을 적 추억에 빠질 수 없는 동료요 부하였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옛날 소가 하던 역할을 기계가 대신한다. 그러면서부터 집안의 일꾼으로 크게 대접받던 소가 지금은 인간의 입맛을 돋우는 육우(肉牛)로 변하였다. 소에게 먹이를 주는 방법부터 다르다. 인공사료를 먹여 광우병에 걸리는 소가 있지만 전에는 쇠죽을 정성껏 끓여주었다. 시골에서 우리 할머니의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아침 일찍 쇠죽을 끓이는 일이었다.
쇠죽을 끓이는 큰 솥은 용도가 다양했다. 여물 속에 푸른 콩과 감자를 넣어 익혀 먹기도 하고 소에게도 주었다. 겨울에는 대야 물을 솥에 넣고 따뜻하게 데워 세수를 하는 등 쇠죽을 끓이는 일 말고도 그 솥을 이용하는 용도가 많았다.
쇠죽을 큰 통에 담아 구시통(구유)에 부어주면 나는 달걀 두 개를 가져다 소 앞에서 깨어 쇠죽에 넣어주었다. “워이, 어서 묵어, 묵어!”매일 아침 나의 이 행동을 보고 있던 메리는 달걀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낮에 닭이 알을 낳았다고 울면 메리는 컹컹 짖으며 빨리 가보라고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우리 집 달걀은 날마다 소에게 주는 영양소였다. 소도 그걸 알고 있는 지 큰 눈을 껌벅이며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경운기가 나오기 전에는 농촌의 소는 동물 중에서 인간을 위하여 철저하게 봉사하는 동물이었다. 묵묵히 힘든 일을 하며, 식사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먹이도 위에 넣어두고 있다가 한가한 휴식시간에 음식을 씹곤 한다. 그러다가 나이 들고 노쇠해지면 생을 마감한다.

며칠 전 전주종합경기장에서 ‘한우 축제’가 열렸다. 그때 몇몇 여자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한우 최고’라고 외치는 사진을 보았다. 한우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제법 토실토실한 모습이었지만 별로 예쁘지는 않았다.

새로 짚을 넣어준 푹신한 소 마구에서 잠들었던 일이 있었다. 집안 어른이 온다고 핑경 소리를 크게 내어 나를 깨워주던 나의 벗 늙은 소!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가을일거리를 준비하는 계절이 올 무렵, 우리 집 소의 그 큰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소가 운다고 소리쳤다. 그 이튿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낯선 소가 소마구에 있었다. 나이가 들어 우(牛)시장에 가서 팔고 젊은 소를 사왔다는 것이었다. 그 젊은 소는 잘 친해 보자는 듯 유들유들한 표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장밧뜰’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 메리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장밧뜰’은 어릴 적 나의 놀이무대였으며, 시골의 정서를 안겨주던 곳이었다. 내 주변에서 놀며 꼬리치는 충실한 부하 메리와 나를 태우고 다녔던 소는‘장밧뜰’과 더불어 나의 추억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아름다운 파노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