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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한일신
ㆍ작성일	2009-07-19 (일)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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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그리워
밥이 그리워

전주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한일신

태풍 '베라'가 강풍과 폭우를 몰고 온 1986년 8월 19일, 내가 근무하던 산골마을마저도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뿌리채 뽑아버리고, 비닐하우스의 철근도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렸다. 그래서 1년 농사를 망치고 허탈감에 빠진 한 주민의 비닐하우스를 20여 명의 민·관이 합심하여 복구작업을 하기도 했다. 당시 연일 신문이나 TV 방송에서 발표하는 피해상황이 어찌나 크던지 길을 나서기조차 무섭고 두려웠다. (피해상황은 341명 사망 실종, 372여억 원 재산피해)

그 무렵 나는 직장 인근에 방을 얻어 살면서 주말에만 전주 집에 갔는데 집에서는 오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 쌀이 모자라서 걱정이 되었다. 다음 토요일까지 버티려면 8월 28일 아침부터 8월 30일 오전까지 7번의 끼니를 때워야 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감자뿐인데 그나마도 끼니마다 3개씩만 먹어야 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되니 밥이 너무 그리웠다. 그런데 마침 관내에 근무하는 K가 점심을 사주겠다며 나오라고 했다. 고마워서 단 걸음에 달려갔다. 점심을 먹는데 밥이 어찌 그리도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마을에서 쌀을 살 곳이란 방앗간뿐이었는데 그곳은 가마로만 낸다기에 일찌감치 쌀 살 생각은 접어야 했다. 나는 생각 끝에 인근에 있는 작은집에 갔지만, 쌀을 꾸어달라는 말은 못 꺼냈으니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내성적(內省的)이라서인지, 아니면 남에게 신세를 지면 꼭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아무튼 좋은 성격은 못 되는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는 아예 가을이면 매년 1년 먹을 양식을 비축해 놓는 게 습관처럼 되었다.

쌀을 많이 팔아놓으니까 또 문제는 있었다. 여름이면 쌀벌레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쌀이 햇빛을 보면 부서지니까 자리를 깔고 그늘에 펴서 널어놓으면 벌레들이 속속 나갔다. 그런데 나갈 때 바깥문 쪽으로 머리를 두르고 나가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모두 안쪽으로만 기어드었다. 그러니 집밖으로 나가서 공사를 벌여야 했다. 웬만치 나가면 일일이 벌레를 가려내고 쌀을 체에 쳐서 벌레 알을 뺀 다음 냉장고에 넣어두면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여름철에는 냉장고에 쌀이 들어갈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쌀통을 놓아야 하며 ② 빨간 고추와 마늘, 참숯을 쌀통 안에 넣어 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했다. 보통 쌀5~10kg에 고추 3~4개를 넣고 2개월에 한 번씩 고추를 갈아주라고 하니 한 번 시도해봄직하다.

잡곡(찹쌀현미, 수수, 보리 등)은 벌레가 더 끈다. 얼마 전 아파트 현관문 앞에 널어놓고 벌레를 잡고 있는데 앞집 아주머니가 알려주었다. 벌레를 다 내보내고 음료수 병에 넣어놓으면 벌레가 안 생긴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빈 소주병 6개를 구해 잡곡을 넣어 베란다 한쪽에 두었다. 한 달쯤 되었는데 아직 벌레가 하나도 안 생겼다. 유충이 살 수 있는 공기와 온도 습도가 차단되었기 때문일까? 아, 이 좋은 방법을 왜 진작 몰랐을까?

해마다 여름이 되면, 태풍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며 몹시 밥을 그리워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때 밥집을 하시던 내외분이 다 고인이 되셨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맛있는 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어려운 시간을 내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만일에 식당을 운영하게 되면 고혈압, 당뇨, 비만환자 등 체질에 맞게 맞춤식단을 만들어 건강에도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꼭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그동안 살면서 배운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밥 한 그릇의 고마움과 따뜻함이 한 알의 밀알처럼 삯을 피울 수 있으리라.

(2009.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