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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박인경
ㆍ작성일	2009-12-29 (화)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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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
해 후(邂逅)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금요반 박인경

할머니가 보였다. 사거리에서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다. 길 건너 쪽에 머리는 쪽을 지고 고운 한복을 입고 등이 굽은 할머니가 천천히 걷고 계셨다. 신호가 바뀌자 나는 건너편을 향해 뛰어 가다 이내 멈춰 섰다. 그제서야 할머니가 돌아가신 분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가끔 나는 이런 착각을 일으킨다. 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의 노인을 보면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 산소에 간다. 할머니는 한 해 먼저 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계신다. 생전에도 금실이 좋았던 두 분은 돌아 가셔서도 한 무덤 속에 누우셨다. 가신 지 여러 해가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할머니의 꿈을 꾼다.

동백기름을 발라 곱게 빗은 쪽진 머리에 하얀 얼굴의 단아한 모습이었다. 병풍을 둘러 친 넓은 평상 위에 앉아 계셨다. 물이 가득 찬 저수지가 앞에 있었다. 나를 바라보시며 '네 것이다.' 하셨다. 새벽녘에 꾼 꿈이었다. 할머니를 꿈에 보면 좋은 일이 생겼다.

부동산 경기가 계속 하락할 때였다.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옮길 좋은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니 마침 수리를 마친 집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아쉬운 점은 전세로 8개월을 임대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궁리 끝에 아버지께 의논을 하니 모자란 액수를 빌려 주셨다.

계약을 한 며칠 뒤부터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집을 팔았던 사람이 계약을 파기하고 싶다고 했다. 계약금의 두 배를 배상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인지 잠잠해졌다. 몇 개월 후 살고 있던 집을 높은 가격에 팔았다. 정상으로 움직일 때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집을 옮길 수 있었다. 다들 부러워했다. 새 집으로 이사하고 제일 먼저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는 열여덟의 나이에 네 살 아래인 할아버지와 혼인하셨다. 손이 귀했던 집안에 아들을 넷이나 두어 윗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할아버지의 학업은 계속되어 할머니는 새벽 네 시면 일어나 평택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통학하시는 할아버지를 십여 년 간 뒷바라지를 하셨다. 대학을 졸업하신 후 할아버지는 고향에서 학당을 열어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이면 할머니와 마주 앉아 공부를 하셨단다. 그런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창 너머로 두 분 모습을 구경하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첫 손녀인 내가 태어나고 다섯 해 뒤에 동생이 태어나자 나는 할머니의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할머니의 말랑거리는 손등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 새 잠이 들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타지로 전근을 가셔도 나만은 조부모님 곁에 남아 있었다.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께 바늘귀에 실도 꿰어 드리고, 라디오 연속극도 함께 들으며 정이 쌓였다.

운명의 시샘이었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의 오른쪽 발가락이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통증을 호소하셨다. 병원으로 가니 동맥경화증으로 혈관이 막혀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허벅지까지 절단해야 한다는 검진 결과가 나왔다. 다리 한 쪽을 잘라 내게 되었다. 집안의 모든 식구들은 침통해 했고. 대 수술 후 재활센터에서 목발을 짚고 걷는 법도 배우셨건만,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그 날부터 문밖으로 나서질 않으셨다. 평생 양반 집 마님으로 살아 오신 분이니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크셨을까.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 그것은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대쪽 같았던 그 분은 세상과의 단절을 택하셨다.

그 후 할아버지는 더욱 할머니에게 정성을 다하셨다. 석간신문이 오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함께 신문을 읽으시며 밖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다. 단절된 세상과의 다리 역할을 하신 것이다. 낮 동안 할머니는 홀로 앉아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외우셨다. 항상 당신이 전생에 죄가 많다고 참회하셨다. 그래서인지 천수를 다하고 편안하게 돌아 가셨다. 돌아가신 후로 무슨 일이 생길 때면 변변치 못한 손녀가 걱정이 되시는지 할머니는 꿈으로 현몽(現夢)을 하신다.

무덤가의 잡초를 하나씩 뽑는다. 꿈과 현실사이의 연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만남을 무한의 사랑으로 느끼며 나는 할머니의 유택(幽宅)을 떠났다.

(2009.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