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점심을 같이하자고 하여 단골 추어탕 집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문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외투를 입은 노인과 함께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들어 왔다. 내 옆에서 점심을 먹던 젊은이들이 전부 일어서서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노인은 계산대에 가더니 지갑을 열고 젊은 사람들의 점심 값을 내려는 것 같았다. 식사대금이 이미 계산되었음을 알고 난 노인은 늦었다는 듯 술이라도 한 잔 하라며 그들에게 권하였다. 노인과 젊은이들과의 관계가 돈독(敦篤)해 보였다.
노인이 화장실에 다녀오다 내게 윤 선생이 아니냐며 악수를 청할 때, 나는 깜작 놀라 일어섰다. 최승범 교수님이셨다. 그저 젊은 사람들을 잘 대해주는 노인으로만 보았고, 존경하던 어른을 몰라 뵌 내가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교수님은 이기반, 허소라, 김학 교수님과 함께 우리 전북문학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활동하셨고, 지금은 후학들을 보살펴주시어 문하생들이 찾아뵙는 문학계의 어른으로 모시는 분이다.
어른들을 만나면 인사를 잘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밥상머리에서 항상 들어 왔었다. 우리 집에 찾아오시거나 동네 고샅길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언제나 인사를 하며 자랐다. 어른들이 나를 칭찬해주시면 몹시 좋았었다.
인사를 잘 하는 어린이들에게 내가 받았던 어른들의 칭찬을 되돌려 주고 싶지만, 요즘엔 노인들에게 인사를 잘 하는 어린이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린이를 만나면, 머리도 쓰다듬어 주면서 귀엽게 생겼다고 칭찬해준다. 착하다며 몇 호에 사느냐, 몇 학년이냐 등등 물을 때가 가끔 있다. 칭찬을 받은 어린이는 만날 때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에게 인사를 잘 하여 그 만남이 즐겁다.
우리 노인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6ㆍ25) 전ㆍ후에 태어났다. 일본 사람들에게 식량까지 수탈(收奪)당하고, 광복 후에는 한국전쟁까지 일어나 굶주림에 허덕이며 어렵게 살아왔다. 배울 기회조차 잃어버리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며 자식들을 교육시키느라 어느새 백발(白髮)이 되었다.
가부장제도(家父長制度)가 무너지고 물질만능주의로 변하고, 서구식 핵가족시대가 되더니 노인들의 권위마저 상실되어 많은 노인들이 허탈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존경과 사랑으로 부양을 받아야 할 노인들이었다. 자신들의 노후대책은커녕 할 일과 갈 곳도 없어져, 외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노인은 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없거나, 종합적 사고(思考)능력이 감퇴하는 60세 이상을 일컫는다. 그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몸의 기관과 조직의 기능이 쇠퇴하여 생활에 적응력이 떨어지고, 신진대사능력과 체력, 감각기관의 민감성이 쇠퇴하기 마련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갑작스런 가치관의 변화와 고령화(高齡化)사회가 되다보니 노인문제가 사회문제로 된 것은 엊그제 일이 아니다.
보통 나이가 많으면 노인이나 어른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지만 노인보다는 어른의 칭호가 부드럽고 듣기 좋다. 어른은 단순히 늙었음만 나타나지 않고 존경(尊敬)의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노인들을 보살펴주는 노인복지관 같은 곳에서는 노인들을 어르신이라고 불러 주지 않던가?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함께 살아가는 인간관계(人間關係)를 풀어가는 것이 순리(順理)일 것 같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모두 노인이 되지만, 존경심이 담겨진 어르신이란 존칭을 받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노인은 존경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어른이 되고, 젊은이는 칭찬받으며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인간은 상대적이다.’ 란 글귀가 머리를 스친다. 바보처럼 살라는 가슴속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인다. 자식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뒤 늙은 아버지의 권위를 찾으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포근해진다.
오늘 따라 존경하는 최 교수님이 더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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