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수영
ㆍ작성일	2010-01-10 (일) 13:21

ㆍ추천: 0 ㆍ조회: 2653

이야기가 있는 찻집
이야기가 있는 찻집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김수영

입안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나뒹군다. 그리고는 신랄하게 뒤섞인다. 달콤할라치면 이내 커피의 씁쓰레한 맛이 엉키는데 참 묘한 맛이다. 바닐라아이스크림향이 봄날의 포근함을 연상시킬라치면 커피의 진한 향은 중후한 가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 커피를 부어 먹는 아포가또다. 이날 처음 먹어본 그 커피는 독특한 맛과 상큼함을 선사해줬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커피와 아이스크림이 만나 색다른 맛을 그렸다. 내 작은 인식의 구석진 곳에 신선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은 이곳에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넷의 나이는 무려 200살에 가까웠다. 그 수치의 길이만큼이나 살아온 세월이나 환경, 어느 것 하나 닮은 것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도시적인 이도 있었고, 소박하며 전형적인 어머니를 닮은 이도 있었다. 그런 우리들이 눈이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찻집에 모였다. 찻집의 문을 열자 주인보다 진한 커피향이 먼저 우릴 반겼다. 그 커피향에 취해 잠시 몽롱해졌다. 입안에서 즐기는 커피보단 커피향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 눈이 빗발치게 내리는 오후, 지인이 하는 찻집을 떠올리는 이가 있었다. 어떤 이는 스카프 휘날리며 전주천을 거닐고 싶다는 이도 있었다. 이런 날은 따뜻한 방에 누워 책을 보는 게 최고라고 나는 생각하던 터였다. 그렇게 눈이 와서 좋은 이들과 그로인해 심난한 나는 차(茶)로 인해 하나가 되었다.

무엇이 서로 다른 우리를 12월이 저물어가는 이때 모이게 했을까. 정말 눈 때문에? 눈은 하염없이 내리다가도 잠시 숨을 고르듯 잠잠하다 내리길 반복했다. 그 잠깐 동안엔 햇살이 내리 쬈다. 마치 겨울이 왔다 불현 듯 여름이 스쳐지나가는 듯 얄궂었다. 우리의 인연이 그런 것일까. 나이, 성격, 스타일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차 취향까지 사뭇 다른 우리들이였다. 10년 전 아니 3년 전 만해도 시장 한 귀퉁이에서 조차 스칠 인연이 아니었다. 어쩜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모르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들이 지금 이곳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문학이란 친구 때문이었다. 저마다 자기 앞에 놓인 각각의 찻잔처럼 개성이 강한 우리들은 문학이란 그릇에 한데 어우러졌다. 그저 순수하고 풋풋한 문학소녀들 같았다.

어깨에 눈이 소복히 얹은 한 사내가 찻집으로 들어섰다. 낯선 사내는 어떤 인연을 만나러 온 것일까 자못 궁금해졌다.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어서일까. 이야기가 익어갈 무렴 사내가 들어온 문으로 Y는 또 다른 인연을 만들러 갔다. 차갑게 식은 빈 찻잔만이 그녀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떠난 자리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그 미련이 채 가시기도 전에 L이 함박웃음을 띠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L 또한 우리들의 만남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오랜 친구처럼 익숙했다. 따뜻한 차 때문이었는지 문학을 좋아하는 소박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함께 한 시간이 돈독하게 느껴졌다. 문학이 인연의 세월보다 더 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눈이 쌓일수록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 많이 쌓였다. 빈 찻잔에 채울 우리의 삶과 문학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함께 할 수 있는 이 순간이 즐겁고 소중했다. 스치는 인연을 놓지 않고 만들어가는 그녀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서로의 모나고 맞지 않는 부분까지도 살며시 내려놓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 안에서 배려가 움트고 우정이 꽃을 피웠다. 눈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우리가 함께한 이 찻집에서의 인연이 진정 문학이었을까? 문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강한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날 수밖에 없었던 달콤한 운명. 차 한 잔으로 붉어진 이날의 이야기가 벌써 추억의 한 편을 자리 잡았다. 언제 또 다시 무엇을 핑계로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기다리는 마음은 가득하다. 진한 커피향이 연신 날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참 귀한 인연의 차를 마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