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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한일신
ㆍ작성일	2010-02-17 (수)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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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장보기
설 장보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한일신

전주 남부시장 새벽 장을 보려고 아침 여섯 시 반쯤 집을 나섰다. 아직 어둑어둑한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어설프다. 설이 사흘이나 남았으니 나중에 갈까 하다가 이왕 나섰으니 비 오는 날 시장을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어쩌면 손님이 없어 물건을 싼값에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전주천변에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 속에 내 차도 끼워 넣은 뒤 우산을 받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군데군데 펼쳐진 비닐 천막과 비치파라솔 등은 설 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사방이 어슴푸레한데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시끌벅적한 고함소리가 깡통에서 연기를 내며 타는 불꽃과 함께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의지하며 시장을 한두 바퀴 돌았더니 아침이 밝아왔다.

하늘을 보니 비가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시골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팔러 나온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고정 상인들만 나온 것 같았다. 천막 안을 가득 메운 과일이나 생선, 곶감 등 제수품을 파는 곳에 주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트럭에는 배추를 가득 싣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지만 한산했다. 천변 앞 노상에도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물건들을 빨리 팔고 가려는 상인들의 손길이 마냥 바쁘지만,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사는 사람보다 파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나도 마음이 바빠 명태와 조기, 야채 등을 대충 사서 돌아왔다.

이들은 새벽시장이 끝나면 주로 모래내시장으로 가서 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한때 모래내시장이 물건이 싸고 좋다는 소문을 듣고 몇 번 가본 일이 있었다. 소문대로 물건은 잘 사서 돌아왔는데 어느 날 주차단속 카메라에 찍혀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물건값보다 몇 배나 비싼 범칙금을 내려니 속이 무척 아리고 쓰렸다. 분명히 경찰에게 주차 여부를 묻고 주차했었다. 또 주차장 안내표지를 보지 못한 내 과실도 있지만,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구호가 야속하기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점심때가 되어 버스가 닿는 중앙시장에 들렀다. 아직 준비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서다. 이곳은 고깃집과 생선가게에 손님이 많았는데 명태포를 떠주는 곳이 제일 붐비는 것 같았다. 나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이것저것 사서 다니려니 너무 불편했다. 손에 든 비닐봉지 숫자가 늘어나면서 아예 우산을 접어버렸다. 이럴 바엔 차라리 마트에 가서 차분히 사서 차에 싣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는 게 지역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참아야 한다고 나 자신을 타이르며 위로했다.

사람 사는 것도 날씨와 무에 다르랴. 누구나 맑은 날만 계속되어 잔잔한 호수처럼 살기를 바라겠지만, 연일 햇볕만 내리쬐면 사막이 되어 살 수 없을 것이다.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 씨앗이 싹을 틔우지 않던가. 우리네 삶의 여정도 행복한 날만 계속된다면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아픔을 겪으며 연륜이 쌓여야 몸과 마음이 다져져서 삶의 무게를 묵묵히 이겨낼 면역이 생기리라.

내가 오늘, 비 오는 시장을 돌며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춘기시절 단칸 셋방에서 살면서 내 방 한 칸 갖기를 소원하였기에 여유가 생기자 제일 먼저 집부터 마련했었다. 추위와 배고픈 서러움을 겪으면서 따뜻함과 음식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지독한 외로움을 못이겨 밤새 펑펑 울고 나서야 울지 않는 성숙함을 배우지 않았던가.

날씨에 상관없이 사시사철 시장을 지키는 사람들. 그들이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리라. 시장의 주 고객은 중장년 주부층이다. 물건을 사며 실랑이를 하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으며 물건값을 깎아주거나 덤으로 더 얹어주는 재래시장. 이 재래시장의 푸근한 인심과 정겨운 풍경은 오래토록 이어져 온 내 고장 전주의 정경(情景)이 아니던가? 새삼스레 따뜻함을 느껴보는 오늘의 설 장보기는 오래오래 내 기억에 남을 것이다.

(20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