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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최윤
ㆍ작성일	2010-03-16 (화)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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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
가계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윤

어렸을 때는 일기를 썼다면 어른이 되어 쓴 것은 가계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혼 한 뒤부터 썼다는 것이 맞다. 난 경제관념이 없어서 결혼 전에는 물론이고 결혼 뒤에도 1년간은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내게 경제권을 주겠다며 통장이며 카드를 내주었다. 그때는 내가 모든 경제권을 다 가진 것 같고, 내게 모든 재산을 준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좋은 돈을 내게 다 맡기다니,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 듯했다. 그러나 훗날, 왜 그가 통장을 주면서 이젠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 내가 정식으로 경제권을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의 경제활동이란 공과금을 내는 것과 그냥 쓰는 일뿐이었으니 말이다. 통장 잔고가 얼마나 되나 하는 생각도 하지 않고 돈을 써서 남편이 알아서 텅 빈 잔고를 채우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으로부터 가계부를 선물 받았다. 그때서야 가계부를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2년차에 그렇게 난 가계부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가계부를 쓴다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이라면 살림을 규모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소비와 지출내역이 눈에 보여 그날 하루를 반성하게 된다. 그러면서 점차 저축을 해야 할 부분과 소비를 늘려도 되는 부분, 그리고 지출을 줄여할 부분들을 점차 잘 알게 되었다. 슬슬 돈이 모이는 재미도 알고 꽤 보람이 있었다. 규모 있게 살림을 하는 달이나 저축을 많이 한 달은 참 뿌듯했다. 그러나 적자 운영이 된 달은 왠지 우울했다. 가계부를 쓰면서 살림에 대한 흥미가 생긴 데는 고마움을 느끼나 가계부의 존재는 날 강박관념에 빠지게 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엔 숫자들로 가득했다. 안중근 의사는 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는데 난 단 하루라도 가계부를 쓰지 않으면 초조했다. 안 그래도 강박적인 성격에 더 일조를 하고 말았다.

내겐 3권의 가계부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수 십 년 동안 쓴 가계부를 모아 놓은 사람을 보고 놀라던 나였지만 이젠 그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가계부가 일기와 비슷한 점은 삶의 기록이며 발자취라는 사실이다. 나도 그 텔레비전에 나온 가계부를 모으는 사람처럼 3년 전 물가와 요즘 물가를 비교해 본다. 기록을 보면 3년 전보다 물가가 껑충 뛰었음을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난 가계부에 틈틈이 일기를 써두곤 했는데 그때의 내 삶이 어떠했는지도 가계부를 읽다가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요즘 가계부는 생활에 필요한 지식들과 좋은 글들도 실려 있어서 살림의 지혜와 감동도 얻게 된다.

가끔씩 3권의 가계부를 일기 보듯 펴 볼 때가 있다. 난 내가 살림을 잘한다거나 경제관념이 뛰어나거나 재테크를 잘하는 주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냥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하고, 작은 지출도 줄여야 한다는 식의 심각하게 적어놓은 글을 보면 왠지 웃음이 난다. 그리고 왠지 흑자를 낸 달을 보면 내가 살림왕이 된 듯 우쭐해지기도 한다. 아마 주부 선배들이 본다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말이다.
난 해가 바뀌기 일주일 전쯤 가계부를 사러간다. 올해는 어떤 디자인의 가계부가 나왔을지 기대하면서. 그리고 내년에는 좋은 일만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계부를 고른다. 1년간 나의 살림 친구가 되어줄 가계부를 신경 써서 고르며 첫 장에 나의 계획과 꿈들을 하나씩 적는다. 올해에도 식구들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2009.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