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탁자 위의 삼각형 기둥모양의 수석 한 점이 내 눈길을 끌고 있다. 뉴질랜드 남 섬 퀸즈타운 와카디프 호숫가에서 우연히 만난 돌이다. 한 뼘 높이쯤 되며 검은 질석바탕에 꼭대기는 흰 맥석이 덮여 있고 두 줄기 폭포가 아래로 흘러내리는 문양을 하고 있다.
몇 해 전, 새해를 맞이하여 뉴질랜드 남 섬을 여행하였다. 그 곳은 우리나라 계절과 정반대로 뜨거운 한여름이었다. 한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성하기인데도 수천 미터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이 흰 모자를 쓰고 있어 신비로웠다.
관광 휴양의 도시 퀸즈타운에서 일박을 하고, 세계에서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곳 4위로 지정된 밀포드 사운드로 가는 날이었다. 꼭두새벽 4시에 버스가 출발하였다. 여름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만년설 바위산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바위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수천 개의 물줄기가 하늘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다. 일행 모두 입이 벌어지고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수묵의 동양화 속에 내가 서 있는 듯했다.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초자연적 비경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밀포드 사운드를 구경하고 다시 퀸즈타운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5시, 이곳은 오후 9시가 되어서야 해가 진다. 남은 시간을 퀸즈타운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와카디프 호수주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만년설이 녹아내린 호수는 유리처럼 맑고 투명했다.
나는 여행지를 들를 때마다 그곳을 기념할만한 소품을 구입하거나 수집하기를 즐긴다. 취미라기보다 습관인 듯싶다. 의미가 될 만한 조약돌이나, 조개껍질, 수석, 나무 장식품 등이다. 호수공원 주변을 돌다가 돌무더기가 쌓인 곳으로 갔다. 이런 곳은 탐석하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눈을 하고 예리하게 돌 하나하나를 살폈다. 모양, 색깔, 무늬, 질감들이 다양하나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기야 특별한 것이 흔할 리도 없을 일이다. 허긴 아무렇게나 뒹구는 돌도 아무에게나 인연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자기를 진실로 사랑해 줄 상대가 나타나야 연인처럼 모습을 보여준다. 인연을 허락하는 돌은 땅속에 숨어 있거나 하천이나 강바닥에 흩어져 살다가, 초례청에서 신랑을 처음 보는 신부처럼, 상대방을 곁눈으로 살짝 쳐다보는 설렘으로 만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얼굴을 보여주는 영물 같은 존재가 돌이다. 그 진정한 가치와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빠금히 얼굴을 내밀고 인연을 허락해준다. 발부리로 뒤적이며 심심파적으로 걷다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흙 때가 묻은 검정바탕에 틈새로 흰 문양이 흩어져있는 질석이었다. 돌을 손위에 올려놓고 세밀하게 관찰하며 모양을 살펴보았다. 옆으로, 세워서, 앞뒤로 쳐다보다, 예사로운 돌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돌 상단 뾰쪽한 부분이 흰 맥석으로 덮여 있고, 위에서 늘어뜨린 두 줄기의 흰 맥석이 또렷했다.
숙소에 돌아와 돌을 깨끗이 씻었다. 탁자 위에 돌을 올려놓고 돌을 감상하다 나는 "그렇지!" 하고 소리가 나게 무릎을 쳤다. 오늘 내가 보고 온 밀포트 사운드의 비경을 담은 돌이 아닌가. 돌 머리 위 흰 맥석은 산 정상의 만년설 그대로이고, 위에서 아래로 그려진 두 줄의 흰 맥석 띠는, 산 계곡을 따라 흰 물줄기를 쏟아내는 쌍둥이 폭포의 장엄한 모습이었다. 내 가슴이 쿵쿵 뛰다가 산 메아리로 울렸다. 그곳의 여신이 그림으로 그리다가 밀 포트 사운드의 시샘으로 돌로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죄를 물어 추방당한 여신의 혼이 스몄을까? 아무튼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나와 인연이 된 이 돌은 만년설 얼음이 팽창되어 쪼개질 때 얼음과 함께 떨어져 나온 바위의 아들인지도 모른다. 아니 화산이 폭발할 때 튀어나온 한 조각의 파편인지도 모른다. 내 짧은 인생의 연수보다, 족보로 따질 수 없는 수백 대를 앞선 시조 할아버지뻘 되는 돌이 아닐까? 나보다 수십만 배의 고통과 아픔을 인내로 승화시킨 돌…….
헌데, 대자연의 풍경을 오붓이 담고 있는 이 돌이 하필이면 내 눈에 띄었을까? 누가 왜 내게 보냈을까? 내가 돌을 사랑했기 때문에? 수억 만 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준 돌이 소중하고 그 인연이 궁금했다. 기특해서 돌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 주기로 했다. ‘연석戀石’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자 연석은 제 족보를 펴놓고 영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처음, 저 높은 설산에서 뭉툭하고 볼품없는 한 덩이 돌이 굴러 내렸다. 폭우로 휩쓸리고 큰 바위에 부딪쳤다. 얼기설기한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뼛조각이 부서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 괴로움, 아픔의 언어를 두 줄기 무늬로 새겼다. 모난 자신의 몸이 강물과 모래에 할퀴고, 닳고 둥글게 되기까지 모든 시련을 수용하며 지냈으리라…….
집에 돌아와 끓는 물에 돌을 삶고 깨끗이 목욕시켰다. 동백기름을 정성스럽게 듬뿍 발라 좌대에 앉혀 놓았다. 돌은 반질반질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명문 양반가 규수인가? 머리를 빗고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으로 보인다. 수석장에 서있는 어느 돌에 비하랴. 품위와 자태가 돋보이는 명품이다. 태평양을 건너온 연석이 나와 무언의 대화를 나눌 줄 누가 알았으랴.
오늘도 지친 일상에서 돌아와 집에서 오롯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연석을 본다. 연석은 오늘도 두 줄기 만년설 폭포를 쏟아내며 얽히고설킨 내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주고 보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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