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이 임무교대를 하던 어느 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309강의실에 들어서니 교탁 위에 거무튀튀한 10원짜리 동전 한 닢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예사롭게 여겼다. 하지만 강의도중 자꾸 눈길이 가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그 동전이 저 홀로 이 교탁까지 올라올 수는 없는 일이니 분명 누군가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누가 이 동전을 여기에 가져다 놓았느냐고 물었더니, 진안에서 온 K씨가 웃으며 강의실에서 주웠다고 했다.
동전을 자세히 살펴보니 한국은행이 1990년에 발행한 10원짜리 주화(鑄貨)였다. 그 주화는 지난 20년 동안 이 세상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309호 강의실까지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 동전을 흘리고 간 수강생은 누구였을까? 이 동전은 지난 20년 동안 얼마나 세상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을까? 이 동전이 두루두루 구경한 일들을 영상으로 재연(再演)하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만들거나 한 편의 수필로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목욕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 동전은 땟국이 줄줄 흘렀다. 마치 6‧25 무렵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던 씻지 않은 거지 얼굴 같다고나 할까? 그런 동전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꽤나 인기가 높았을 것이다. 20년 전에는 돈의 가치가 높았을 테고, 번쩍번쩍 빛이 나서 눈이 부셨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푸대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지금 같은 서러운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문득 이 10원짜리 동전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처음이나 끝이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리라. 이 10원짜리 동전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니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더 높아져야 하리라. 그래야 누구에게서나 존경을 받고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게 될 게 아닌가?
사실 이 10원짜리 동전으로는 동네 구멍가게에 가더라도 연필 한 자루 사탕 한 알 살 수도 없다. 천 원짜리 물건만을 파는 가게는 있어도 10원짜리 물건만을 파는 가게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 10원짜리 동전이 발에 밟히거나 눈에 띄어도 누구나 선뜻 주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K씨는 이 10원짜리 동전을 주워서 교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만약 이 동전이 500원짜리 은전이었다면 그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까?
10원짜리 동전 한 닢을 만들려면 제조원가가 무려 38원이 든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과 은전을 돼지저금통에 넣어 버린다. 그러니 유통이 되지 않는다. 한국은행은 동전 제작비가 동전 가치보다 더 비싸더라도 어쩔 수 없이 10원짜리 동전을 자꾸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니 돼지저금통에 쌓아 둔 동전을 은행에서 지폐로 바꾸거나 저금통장에 입금을 시켜 다시 활용되도록 하는 게 애국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주화(鑄貨)는 1원, 5원, 10원짜리 동전을 비롯하여 50원, 100원, 500원짜리 은전 등 여섯 가지나 된다. 그러나 10원짜리 미만의 동전은 실제로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200여 년 전에 제조된 달러 은화(銀貨) 한 닢이 93억 원에 팔린 일이 있다고 한다. 1794년 1,750개의 은화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 150개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된 동전을 모으면 미국에서처럼 언젠가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릴 수도 있을까?
요즘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6가지 동전과 은전 가운데 가장 활용도가 높은 것은 500원짜리 은전이 아닐까 싶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전철역에서 65세 이상, 나라가 공인해 주는 국정노인(國定老人)들이 무료 전철승차권을 구하려면 500원짜리 은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증을 넣고 500원짜리 은전을 넣으면 기계에서 무료승차권이 나온다. 또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무료승차권을 다시 기계에 넣으면 500원짜리 은전이 나온다. 국정노인들이 지하철을 탈 때마다 그런 일을 되풀이 하니 500원짜리 은전이 얼마나 바빠졌겠는가? 10원짜리 동전도 처음에는 지금의 500원짜리 은전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 500원짜리 은전도 언젠가는 지금의 10원짜리 동전신세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자연의 세계는 물론 돈의 세계에서까지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2010. 5. 31.)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등 수필집 10권, 수필평론집《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전주시예술상, 신곡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대한민국향토문학상, 목정문화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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