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4일 저녁 무렵, 전주시온성교회 ‘구역 대항 탁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전북학생회관 체육관은 열기로 가득 찼다. 남자 여자 단식게임, 복식게임, 혼합복식게임 등, 자기 소속 구역을 대표하는 수십 명의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여 게임에 임하는 자세는 프로 선수들 못지않게 진지했다. 여기저기서 통통 튀는 탁구공 소리와 함께, 자기 팀이 이길 때마다 터져 나오는 북 소리, 박수 소리, 환호성 등으로 체육관은 활기가 넘쳤다.
나는 원래 스포츠에는 관심도 없고 탁구도 칠 줄 모른다. 그래도 오늘 경기를 정말 재미있게 구경하고 또 신나게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선수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구역장을 맡고 있는 302구역은 세대수도 적고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이 없어서 기권할까 하다가, 순천에 있는 남편에게 부탁을 해보았다. 남편의 대답은 내가 묻기가 바쁘게 ‘안 된다’였다. 왜냐하면 남편은 아직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 아니라,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뵙고 살펴드리면서 일요일까지 어머님 곁에 머무는 효자 중의 효자이기 때문이다.
내 기준으로 볼 때 남편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 말고는, 걸어 다니는 도덕교과서쯤 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도 근면 성실하고, 피붙이 가족들에게는 지극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로 똘똘 뭉쳐 있어 누가 봐도 백점 아들에 모범생 형님이다. 예나 지금이나 쉬는 날이면 부모님 댁에 가서 농사일을 도와드리고, 농사일이 없을 때에는 ‘놀더라도 부모님 곁에 가서 노는 게 당연하다’ 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우리 시부모님에게는 더 없이 자랑스럽고 든든한 큰아들인 것이다.
반면 나는 남편과 생각이 다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2/24) 라는 성경말씀이 효도의 기본 원리라고 믿고 있다. 남녀가 결혼하면 그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부부가 화목한 모습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것이 효도의 출발점이라 생각해 왔다. 이렇게 생각의 차이가 나는 우리 부부는 항상 서로에게 불만을 느끼면서 일요일이 되면 남편은 부모님 찾아뵙는 것을 신앙처럼 여기고, 나는 교회에 가서 우주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내 성격은 은근히 호기심도 많고 진취적인 데다가 자의식 또한 강한 편이다. 이러한 내가 농사일도 많고 전통적인 관습이 짙은 시골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잘 할 수 없었다. 대신 남편이 마음껏 효도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도리인 것 같아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이면 뭐든 남편을 눈 감아 주며 살고 있다. 배우자로서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세기2/23)로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은 아예 포기하고, 효심 지극한 남자와 그냥 친구처럼 사는 셈 치는 것이 속 편하겠다 싶었다.
내가 직업이 있고 적극적인 교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이 두 가지는 내 마음에서 솟구치는 갈증들을 해소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며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 믿고, 남편은 효자 역할에 힘쓰고 나는 아이들 교육에 힘쓰면서 오랫동안 주말부부처럼 살아왔다.
우리 부부는 여태까지 제대로 된 부부동반 여행을 한 적도 별로 없고, 부부사이에 서로 챙겨 주는 무슨 기념일 같은 것도 다 생략하고 살아왔다. 부부간에 정다운 시간을 갖는 것보다는 자나깨나 부모님 걱정만으로 가득 차 있는 남편이 때로는 야속해서, 만약 '효자의 날'이 제정된다면 내 남편이 첫 번째 상을 받아야 한다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곤 했던 젊은시절이 어느새 다 지나가버렸다. 나이가 웬만큼 들고보니 자주 눈을 흘기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는지 이제 웬만한 것은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춘하추동 한결같이 동분서주하는 남편의 삶이 너무 고달파 보여 안타까운 때가 많다. 남편의 형제 넷이 하나 같이 효자여서 좀더 마음 가볍게 할 수도 있는데, 남편은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혼자서만 너무 완벽하게 지려고 한다. 5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계신 어머님이 점점 연로해지시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삶의 여유를 외면하고 사는 듯, 항상 심각한 남편 얼굴을 보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효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못 오겠다는 남편을 어떻게든 교회탁구대회에 참여하게 하고 싶었다. 늘 고단해 보이는 남편에게, 밝고 유쾌한 우리 교회 분위기를 경험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마지막 카드를 제시했다.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우리구역만 선수가 없어서 아직 접수를 못했어요. 그러니 당신이 꼭 와서 내 체면 좀 세워줘요. 그리고 그 때가 내 생일 무렵이니까 생일선물이다 생각하고 참석해줘야 한다고요.”
생전 안하던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애교 반, 사정 반 부탁을 하는 마누라가 딱했던지, 아니면 신기했던지 남편이 토요일에 왔다. 못이기는 척 교회예배에도 참석하고 탁구대회도 참가하기로 했다. 그동안 내가 그렇게도 바라던 일, 남편과 내가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구나 생각하니 어찌나 감사하던지, 내 마음 속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오후예배를 마치고 열린 탁구대회 분위기는 뜨거웠다. 남자 단식경기에 참가한 남편은 배정된 조에서 최고 연장자였다. 한참 젊은 상대편에게 패하는 첫 경기를 치르고 혹시나 속상해 할까봐 계속 눈치를 살펴야 했다. 두 번째 선수와의 경기 때는, 내 속으로 상대편 젊은 선수가 일부러 져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열띤 응원을 했지만 또 졌다. 세 번째 선수와의 경기에서 간신히 이겨 예선 리그전 성적은 1승 2패로. 본선 진출도 못해보고 남편의 탁구 경기는 끝나버렸다.
“당신 아주 잘했어요. 오랜만에 해서 그렇지 만약 연습을 좀 했더라면 당신이 틀림없이 일등 선수가 됐을 거예요.”
위로하면서 남편 얼굴을 살피니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경기가 끝나고, 교회에서 예약해둔 식당으로 향했다. 다른 성도들과 한 자리에 어울려서 뜨거운 콩나물 국밥 한 그릇으로 탁구대회 뒤풀이를 하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당신 덕분에 302구역장 내 체면 세웠네요, 그리고 오늘 탁구대회 선수들 중에 당신이 제일 멋졌어요. 나 오늘 정말로 기분 최고예요.”
하고 내가 계속 싱글거리자 남편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생일 선물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밖에 나가보든지.”
나는 속으로 ‘우와! 이 남자 오늘은 남편이 아니라 완전히 내편이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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