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 않고 입을 꼭 닫고 있는 꽃봉오리가 있다. 간절히 님을 기다리는 까닭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빛줄기가 시원하게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입을 연다.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손톱으로 튀기면 터지는 봉숭아 씨방을 닮았는가? 굵은 빗방울이 봉오리를 두드리면 그때서야 꽃잎을 활짝 펼친다. 애타게 기다리던 님을 맞아 화들짝 반가운 미소를 건넨다.
지난겨울 꽁꽁 언 땅속에서 알뿌리로 혹독한 추위를 견뎌냈다. 어둠 속에 갇혀 밝은 세상을 그리워했다. 봄이 되어 싹이 돋고, 키를 키워 햇볕이 따가워질 때쯤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흰색의 꽃봉오리, 그 색이 눈부셔 투명한 연두를 살포시 뒤집어썼다. 그래도 여전히 흰색이다. 깜깜한 땅 속에서 겨울을 보내더니 색감을 잃어버렸나보다. 빨강도 있고 노랑도 있고 주홍 하다못해 연분홍도 있는데, 모든 빛깔을 망각했나보다. 색이 없어서 순수인가, 범접할 수 없는 맑음이어서 순결인가, 비를 연모해서 깨끗한 사랑인가? 순수, 순결, 깨끗한 사랑이라, 나는 그를 꽃말로 기억한다.
나리꽃이다. 백합이라 해야 더 친숙할 것인가? 장마가 시작하면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장마가 물러갈 때 함께 지는 꽃이다. 꽃나무의 자랑은 꽃이리라. 만개한 꽃으로 화려함을 뽐내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데, 나리꽃은 비가 내리는 장마철에 만개한다.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꽃에 의지해 살아가는 벌나비도 날개를 접는다.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외로운 꽃, 오로지 비만 함께할 뿐 누구도 친구가 되어주지 않는다. 내리는 비만이 함께한다. 홀로 있는 고독을 내리는 빗방울이 속삭이며 달래준다. 저 멀리 사람들의 소식과 벌나비들의 안부를 전해준다.
외로움에 사무쳐 슬퍼할 때 함께 할 이 없는 혼자였다. 성취로 열광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이 없는 혼자였다. 혼자가 좋아서일까, 어울리지 못해서일까? 나는 슬픔을 홀로 삭이고 기쁨을 외롭게 즐겼다. 아무도 관심을 갖는 이 없는 철저히 혼자인 나, 나는 나리꽃의 쓸쓸함을 나의 것으로 여겨 슬퍼한다.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나리꽃 주변을 서성인다. 볼록하게 부풀어 올라 곧 터질 것 같은 꽃봉오리에 코를 가까이 댄다. 아직 향기가 없다. 젖가슴처럼 부픈 꽃봉오리 속에 가득 향기를 가두고서 아직 그 향취를 허락하지 않는다. 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연모의 정이다. 가장 화사한 모습과 가장 진한 향기를 내리는 빗방울에게 먼저 허락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눈이 멀도록 사랑했던 님, 그님에게 모든 것을 헌신했던 나처럼 나리꽃도 비에게만 자신을 헌신하려 한다.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멀지 않았다. 무덥고 습한 공기가 남쪽으로부터 서서히 밀고 올라와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날, 나리꽃과 나는 반가움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쏟아지는 빗방울에 꽃봉오리는 향기를 내뿜으며 닫은 입을 활짝 연다. 나팔을 불며 님을 반갑게 맞이한다. 방금 열린 수 백 개의 나팔이 소리 없는 팡파레를 울린다. 소리가 없어도 느낌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는다. 반가움이 가득 실린 님을 위한 찬가, 그 환희의 찬가는 나와 빗방울만이 듣는 울림이다. ‘뚜뚜뚜’하는 나팔소리가 세상을 진동한다.
비가 내리면 나리꽃은 비로 흠뻑 젖는다. 애타게 기다리던 님, 그 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허락한다. 사랑하는 님의 품에 안겨 모든 것을 허락하는 첫날밤의 숫처녀처럼 온몸을 다 바친다. 나도 내리는 비에 흠뻑 젖는다. 개벽의 순간, 나리꽃이 활짝 열리는 순간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 쏟아지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는 무심하다. 메마른 땅에 내릴 때도 지붕에 내릴 때도 ‘후두둑’ 소리만 낸다. 나리꽃 위로 떨어질 때도 그저 ‘후두둑’거릴 뿐이다. 모든 것을 허락한 나리꽃은 비의 무심함에 눈물을 흘린다. 님을 흠모하며 기다리다 모든 것을 바치는데 비는 잠시 머물다 흘러갈 뿐이다. 무심히 내가 되어 흘러간다. 날이 새면 이별하는 주막집의 하룻밤 풋사랑처럼 미련 없이 떠나고 만다. 비가 내리는 동안 나리꽃은 버려진 채 홀로 흐느낀다. 비도 벌나비도 사람들도 무심할 뿐이다. 무심함으로 고요가 흐른다.
빗물에 젖은 창 너머로 나리꽃을 바라본다. ‘뚜뚜뚜’ 울리던 팡파레도 멈췄다. 집단으로 입을 벌려 향기를 내뿜지만 빗물에 녹아 덧없이 흘러간다. 나는 비를 맞으며 나리꽃 앞에 선다. 모두들 무심한 때 나라도 곁을 지켜줄 수 있어 다행이다. 예쁜 모습 눈에 새겨두고 맑은 향기 가슴에 담아두어 오래도록 기억하리. 비가 내리는 장마 때가 되어야만 피는 꽃, 모두들 움추릴 때 홀로 피는 꽃, 나리꽃은 나를 닮았다. 언제나 혼자인 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혼자인 나, 나도 혼자 피는 꽃이다. 화사하지 못해 담백한 꽃, 만인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 꽃, 나리꽃은 나를 닮은 꽃이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리꽃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나도 혼자 피는 꽃’이라고. ‘나는 너를 위해 피는 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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