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명성이 있는 소설가이다. 최근에 출판된 그의 장편소설「용서를 위하여」를 통해 그를 만났고 책을 덮으면서 마음에 가녀린 파문이 일었다. 2010년 5월 10일에 출판되었으니 막 낳은 달걀처럼 따뜻함이 남아있는 책, 349쪽이나 되는 장편소설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다.
「용서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그리운 이름,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려고 추기경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을 모조리 찾아 다녔다.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고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예전에 ‘극락교’와 관련된 수필 한 편 쓰려고 강천사와 금산사의 극락교 주변을 서성이면서 스스로 흐뭇해했던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한수산은 김수환 추기경의 탄생지인 경북 군위의 생가, 초등학교, 신부 수업을 하였던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 그리고 신부로서의 첫 부임지였던 안동의 목성동성당까지 두루 찾아 다녔다. 선종하였을 때 애도의 물결 속에 파묻혔던 명동성당과 그가 묻혀있는 용인의 천주교 묘지까지, 모든 곳을 가슴에 안아 본 뒤에 이 책을 썼던 것이다.
김 추기경은 어두웠던 군사독재시절부터 바위처럼 서 있었던 우리나라의 어른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같은 권력자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국가의 버팀목이었던 것이다.
추기경은 여느 자식 못지않게 부모에 대한 효심이 강했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강론이나 글을 통해서 솔직하게 보여 주었었다. 한수산은 이 소설을 통해서도 어머니의 추기경에 대한 사랑, 그리고 추기경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효심을 따뜻하게 엮었다.
한수산은 이 책에서 단순히 김 추기경의 행적만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권하에서 겪었던 자신의 아픈 삶도 고백록처럼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 김수환 추기경인데도 나는 오히려 작가 한수산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80년 보안사령부에 끌려갔다. 중앙일보에 <욕망의 거리>라는 소설을 연재하던 것이 핑계거리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절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너 잘못한 거 다 불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까지 잘못한 거 다 불란 말이다’라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고문 앞에 인간임을 포기해야 되는 고통이 전개되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기관에 끌려가면 죽어서 나오거나, 병신 아니면 간첩이 되어 나온다고 들었었다.
한수산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폐인이 되어 나왔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처절하게 당했던 고문.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자백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안사로 끌려와 자기처럼 어려움을 겪게 된 일이었다.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수산은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들을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외쳤다. 아니 기회가 되면 그들을 죽이고 싶다며 칼을 품고 다닐 만큼 증오의 세월을 보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추기경은 사랑의 일치를 위해서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강론을 하였다. 더군다나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 된다는 말씀과 함께. 한수산은 그런 추기경이 원망스러웠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외친다. 추기경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 당신도 그런 고문을 받아 보았느냐며 울부짖는다.
추기경의 영향인지는 모르나 김대중 대통령도 자신을 고문하고 빨갱이로 몰아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전두환을 용서하였다. 난 당시의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 같으면 대통령의 막강한 힘으로 복수를 했을 것이고, 어쩌면 많은 국민들도 내심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김 대통령은 복수보다는 용서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한수산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며 몸부림을 쳤다. 용서할 수 없는 걸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추기경이 모르는 거라며 원망하였다. 그나마 그가 고통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노라고 고백한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기도 하였다. 그곳에 있을 때 우연히 중국을 통해 백두산 여행을 갔었다. 동행중에 이경재 신부와 수녀 2명이 있었다. 운명인지, 아니면 하늘의 뜻인지 여행 중에 수녀로부터 특별교리를 듣고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영세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천주교에서 그런 식으로 영세를 받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에게 영세를 준 신부도 정성을 다하여 추기경과 비슷한 말로 한수산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누구의 가르침도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신부님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행적을 추적하는 중에 돌처럼 굳었던 마음에 따스함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결국, 용서의 마음이 다가왔다. 그것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아, 주님!
제가 용서하지 못하면서 저는 어떻게 용서받겠습니까. 제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저 또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 내가 용서받았으니 그들도 용서하소서. 제가 그들을 용서하오니 , 저 또한 용서 하소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상처를 내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한수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운 사람 김수환 추기경과 이경재 신부가 가져다 준 선물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제는 더 이상 서로 상처주지 않는 만남의 세상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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