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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양영아
ㆍ작성일	2010-08-14 (토)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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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할머니
화려한 할머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양영아

여자를 포기하기엔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 서 보았다. 될 수 있는 한 빛이 덜 들어오는 쪽의 거울을 마주했다. 아직은 괜찮은가? 주름이 있는 걸 애써 못 본 척 눈을 돌렸다. 머리가 자꾸 주저앉는 것이 퍼머를 할 때가 된 듯했다.

미장원엘 갔다. 그날따라 손님이 많았다. 탁자위의 신문을 들춰 기사를 읽었다. 정치면을 보다 말고 사회면으로 넘겼다. 성 폭행 범 이야기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얼른 덮어버리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서너 살쯤 된 꼬마가 칭얼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누나가 자꾸 약을 올리니까 으앙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미장원 안은 울음소리로 시끄러워지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 엄마도 달래지 않고 퍼머하느라 열중이었다. 미장원 원장이야 손님의 아이이니까 나무랄 수 없고 손님들마저도 끼어들지 않으려고 무관심한 척 아무 소리도 없었다. 울음 끝이 너무 길었다. 참다못한 내가 낮은 소리로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우니?” 하고 꾸짖으니까 아이 엄마가 “거 봐. 할머니가 야단하시잖아? 뚝! 얼른 그쳐!” 야단을 치는 시늉을 했다. '할머니라고?' 은근히 화가 났다. ‘괜히 아일 건드렸구나. 다시는 애들 건드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미장원 문을 나섰다.

이튿날 몸이 찌뿌듯하여 목욕탕엘 갔다. 탈의실에 막 들어서는데 어제 그 아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아이가 마루를 뛰어 다니고 있었다. ‘절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눈길도 주지 말아야지.’ 단단히 맘먹고 돌아 앉아 양말을 벗고 있는데 “뛰지 마. 할머니가 이놈 하신다.” 얼른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곳에 있는 건 나 혼자 뿐이었다. 건드려도, 건드리지 않아도 결과는 똑같이 '할머니' 소리를 듣고 만 것이다.

세월을 누가 감출 것인가. 그래! 내가 할머니지 할머니 아닌가? 저 젊은 아낙도 내 딸 또래이거늘……. 내게도 손자가 넷이나 있으니 할머니는 틀림없지. 그러나 내 손자들의 할머니일망정 모르는 젊은이들로부터는 할머니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60대 중반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할머니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늙은이의 속없는 반항이리라. 세월은 나를 이렇게 멀리 데리고 와서 주름까지 선물했다. 한 줄 한 줄 훈장을 주며 어른답게 살라 했건만 아직도 늙지 않았다고 생각한 내가 참 한심스럽다. 여느 노인들처럼 인생이라는 강물에서 헤엄쳐 나온 나도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파를 헤치고 예까지 무사히 헤엄쳐 나온 건 모두로부터 박수를 받아도 족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고령화시대에 접어들었다. 2030년엔 평균 수명이 130살이 된다는 얘기도 있다. 잘못하면 앞으로도 70여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큰일이다.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 했던가. 오래 살아서 좋은 꼴 보기 어려운데 적당히 살다가 건강할 때 흙으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어느새 내가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나. 노인이 된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독일 어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늙어 가는 것을 기쁘다고 말하면서 위로라도 해야 하는가?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길지 모르지만 앞으로 남은 노인시절을 보람되고 여유롭게 살려면 또 무엇인가를 계획해야 하지 않을까?

건강해야겠다. 내가 짐이 되는 불행이 없도록 내 몸은 내가 챙겨야겠다. 계단 중간에 서서 올라오다 섰는지, 내려가다가 섰는지도 모를 치매에 걸려서야 되겠는가? 애국가가 우리학교 교가라고 착각하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용기를 키워야겠다. 젊은이들이 잘못할 때 따끔하게 제자리로 돌아 갈 수 있도록 충고를 주저하지 않는 용기를 키워야겠다. 젊은이들의 행패가 두려워 충고도 못하고 사는 세상, 결코 그것은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리고 용기를 북돋울 수 있는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말자. 밝은 우리나라의 장래가 그들의 것이 아닌가! 혼란스러운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은 우리 어른들의 책임도 크다. 우리 아이만큼은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키워 온 바람에 그들을 허약하고 윤리와 도덕성도 부족한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말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 땅을 맨손으로 일궈온 것이 노인 세대가 아니던가. 아는 만큼 잘 사는 사람이 된다고 소를 키우고 땅을 파서 고급학력을 키워낸 게 배고픈 부모들이었다. 떳떳이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 준 우리 선배 노인들께 깊은 경의를 표할 일이다. 나도 이제 할머니의 대열에 끼어 이 나라를 위해 손자들에게 무얼 가르치고 알려줘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할머니란 인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할머니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다. 할머니는 인고의 세월을 극복해온 애달픈 영광이다. 할머니는 굽이굽이 돌아오는 고갯길에서 많은 경험과 지혜를 배워 온 솔로몬이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용서와 화해를 실행할 줄 아는 선인이다. 이제 나는 화려한 할머니로 거듭 날 것이다.

*수즉다욕(壽則多辱) :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다는 뜻으로 오해 살수록 망신스러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