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한일신
ㆍ작성일	2010-09-27 (월) 14:12

ㆍ추천: 0 ㆍ조회: 2960

팔목부상을 입고(3)
팔목부상을 입고(3)
-기다림-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한일신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왔다. 달력 날짜를 하루 이틀 지우다 보니 깁스 푸는 날이 돌아온 것이다.

병원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린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침내 석고를 자르는 전기톱의 진동과 열감이 피부로 전해지자 행여 다칠세라 잔뜩 긴장되어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마침내 소음이 멈추자 삼복더위도 모르는 체 철옹성(鐵甕城) 같던 깁스의 벽이 헐리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휴~ 그동안 답답하고 괴로웠던 마음도 함께 따라나섰다.

아, 이 얼마나 물을 그리워하며 오늘을 기다렸던가! 집에 오자마자 탕에 들어가 40여 일 동안 쌓인 때를 씻고 또 씻었더니 뼛속까지 개운했다. 왼쪽 팔꿈치 안쪽엔 붉은 반점들이 부풀어 올라 그동안 간지러웠던 고통을 말해주었고, 바깥부분은 아직도 멍이 파랗다. 마음 같아선 깁스만 풀면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어디든 훨훨 날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풀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팔에 힘이 없어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지겨운 가려움에서 해방되어 모처럼 편안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다. 깁스 푸는 날을 알기라도 한 듯 Y선배가 이것저것 맛있는 과일을 잔뜩 사가지고 온 것이다. 강의실에서보다 집에서 만나니 더 반갑고 가깝게 느껴졌다. 오후 내내 말벗이 되어 시름을 달래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에 삭막한 내 마음은 정으로 가득 찼다. 나는 베푼 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며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따스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졌다.

괴롭고 고통스런 시간은 천천히 가는 것 같더니 오늘은 하루해가 빨리 저무는 것 같았다. 저녁에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성한 팔이 아픈 팔의 보호자가 되어 일일이 시중을 들어야 하니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0일이 지나도록 병원에 다니며 아픈 팔을 당기고 누르며 힘겨운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는 건 분명한 일, 너무 서두르지 말자. 아무리 급해도 불을 때고 뜸이 들어야 맛있는 밥이 되듯 다 때가 되어야 하나보다.

왼팔을 다치기 전엔 왼손이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줄 알았다. 설거지나 빨래할 때 면 왼손은 그냥 붙잡고만 있어도 오른손이 비비고 문지르며 다 해내지 않았던가. 또 운전할 때도 왼손보다는 오른손의 역할이 컸는데 막상 왼손이 붙잡을 힘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왼손의 힘은 적지만 결코 적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작은 힘이 큰 힘의 원천인 것을…….

올여름엔 유난히도 늦게까지 전국적으로 잦은 비와 폭염, 거기다 태풍까지 겹쳐 얼마나 살기가 어려웠던가. 그런데도 자연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오늘부터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내 생활도 날씨만큼이나 우울하고 짜증스러웠지만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다. 다소 불편하긴 해도 지금은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지나고 보면 즐거운 일도 괴로운 일도 다 한때인 걸. 성급한 판단의 오류보다는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고 살아야겠다.
(2010.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