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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점구
ㆍ작성일	2010-10-10 (일)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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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나 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이점구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정오 무렵이었다. 사무실로 날아든 나비를 보았다. 아니, 나비인지 나방인지 정확하진 않았다. 형태는 나비인데 날개는 온통 흙빛이었다. 양 날개의 중앙에 물고기의 눈동자를 그려놓은 듯 먹빛이 선명했다. 나비는 사무실 바닥을 낮게 비행하며 출구를 찾았다. 팔랑팔랑,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나비의 날갯짓은 힘겨워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나비를 지나쳐 통로 끝에 달린 작은 창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다시 돌아와 나비의 뒤를 따라 사박사박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나비는 통로 끝에 다다르자 선회를 해서 다시 사무실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오래 전, 한 평(平) 남짓한 공간에 홀로 여러 달 격리되어 지낸 적이 있었다. 사육되는 짐승처럼 하루 세끼 밥을 들여주면 먹고 자는 게 일상이었다. 스스로 찾아 든 길은 아니었으나 제도권에 반하는 행위의 대가였다. 시멘트벽 쇠창살 너머로 보이는 것은 조각난 하늘과 푸른 산등성이였다. 그 작은 액자 같은 창살을 통해 가끔 나비가 드나들었다. 나비는 좁은 공간을 휘돌다 다시 창살을 통해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비를 따라 사방 한 뼘 크기의 창살을 빠져나가 시간여행을 즐겼다.

<빠삐용>은 까까머리 학창시절에 보았던 영화다. 주인공은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여러 차례 탈옥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그는 죄가 더하여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 싸여 탈출이 불가능한 고립무원인 악마의 섬에 수용된다. 그러나 그는 야자수를 가득 넣은 포대를 거친 파도에 던져 넣고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에 성공한다. 그 주인공의 가슴에는 나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빠삐용(Papillon)은 불어로 나비를 뜻한다. 나비는 영화에서 자유를 상징한다. 자유…….

좁은 공간에서 하릴없이 기억의 시간 위를 걷다 보면 잠재된 의식 속에서 많은 일들이 새순처럼 솟아났었다. 마음길은 경계가 없어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많은 기억 중에 유독 어린 날의 고향산천을 많이 거닐었다.

유년의 추억은 본능에 충실한 삶이었다. 먹고, 자고, 놀고. 배가 고프면 길가 황토 밭에서 속살을 키우는 무를 뽑아 풀섶에 쓱쓱 비벼 한 입 덥썩 물었다. 무청은 입안에 달콤한 푸른 맛을 남겼고 서걱서걱 하나를 다 먹고 나면 허기진 배가 불룩해졌다. 들녘과 숲을 지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먹을 거리가 아닌 게 없었다. 풀뿌리도 캐어 자근자근 씹어먹고 여린 소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내고 여린 속살을 이로 갉아 먹기도 했다. 별다른 욕구가 없었으니 당연 불행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행복에 대한 개념을 모르니 그게 행복인 줄도 몰랐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헐벗고 굶주림은 불행이 아니라, 욕망이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너나없이 질척한 노랑 콧물을 훌쩍이던 절대적 빈곤은 추억 속의 먼 이야기가 되었다. 요즘 고기 반찬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욕망에는 커트라인이 없는 것 같다. 채워졌는가 싶으면 어느새 더 높을 곳을 향해 저만치 앞서가고 있으니.

나비는 여전히 사무실을 방황하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책상과 집기들 사이를 날며 나비는 미로를 벗어나려고 여린 날개를 쉼없이 파닥거렸다. 걸음을 멈추고 벽에 부딪칠 듯 위태롭게 비행하는 나비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자(莊子)는 낮잠에서 깨어나 꿈에 본 나비가 자신이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인 내가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인간은 기억이다'라는 글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인간은 기억으로 뭉쳐진 유기체 덩어리’라는 말에 조금은 쓸쓸했지만, 그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을 빌리면 장자는 잠에서 깬 뒤 기억에 의한 자기동일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 뒤 자신이 나비가 아닌 인간 '장자'라는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현실 세계로 귀환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삶이 불우해지면 과거로 현실도피를 한다. 행복했던 시간으로의 퇴행을 반복하다 끝내는 돌아오는 길을 잃어 버리곤 한다. 현실 세계로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니까. 나는 잠시 장자의 꿈처럼 사무실 안의 나비가 되어 보았다. 비좁은 꼬치 속에서 영혼의 심상 같던 영면의 시간을 끝내고 우화(羽化)를 준비하던 그때를. 세상의 빛과 처음 만나던 날, 노란 물결 일렁이던 유채 꽃밭 위를 유유히 날던 봄날을. 바람 없이 햇살 좋은 날, 붉은 사루비아 꽃에 살포시 내려 앉아 달콤한 꿀을 먹던 행복한 시간을…….

나는 내 책상으로 돌아가 책꽂이에 꽂힌 부채를 빼들었다. 부채는 둘째 딸아이가 수업시간에 만들어 내게 준 것이다. 부채의 한쪽 면에는 백합을 닮은 이름 모를 꽃이 다른 면에는 야구유니폼과 배트와 야구공이 그려져 있다. 유니폼에는 나의 등 번호인 29번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보기만 해도 더위가 가시는 부채 덕에 여름을 서늘하게 지냈다. 나는 나비 뒤를 따라가며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었다. 어렵사리 창이 열린 통로로 나비가 접어들었다. 나는 나비가 돌아서지 못하도록 될 수 있는 한, 다리와 팔을 넓게 벌린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