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도 뜨거웠었다. 그런 날씨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침에는 제법 차가움을 느낄 정도였다. 우리 몸이 이러하니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민감해진다.
시원한 날씨 탓인지 이른 아침 전북대학교 분수대 주변엔 여러 형태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동트기 한참 전,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희끄무레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땅을 보며 거닐고 가끔은 앉았다 일어섰다 했다. 분수대 주변 도토리나무 밑을 서성거리며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마에 차는 중국제 플래시를 달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도토리가 항암효과가 있다는 보도 때문인지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어둠이 완연히 사라지고 사방이 상쾌한 아침 기운으로 충만해지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비둘기 떼가 우르르 몰려가는 곳을 보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고 있다. 매일 아침 비둘기 먹이를 공양하고 있어 비둘기한테 인기가 높다.
자전거를 타고 종이 박스를 주우러 오는 아저씨도 보인다. 그 옆에는 언제나 큰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미국에서 딸이 보내주었단다. 이름은 ‘쿨’이고 개를 소재로 한 영화‘베토벤’에 나오는 주인공 개와 같은 종류다. 내가 비둘기를 주려고 가지고 나온 건빵을 주니까 먹지는 않으면서 나를 보고 웃는 모습을 지었다. 마치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투다. 그걸 보고 아저씨가 하는 말이 족보 있는 개라서 남이 주면 절대 먹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에 대한 비판과 지조론을 한참 펼쳤다.
어느 덧 태양이 뜨는 쪽을 향하여 이상스런 폼으로 기(氣)체조를 하는 아저씨도 보였다. 오리 궁둥이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양팔을 앞뒤로 돌리면서 쭉 뻗어‘푸하’하며 거친 날숨을 내뿜었다. 가끔 뒤에서‘뿌지직’소리가 나지만 뒤에 있던 비둘기만 약간 펄쩍 뛰어 자리를 옮길 뿐, 모두들 자기 일에 열중이다.
골프연습을 하는 사람, 주변도로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사람, 반바지 차림에 두 손으로 자기 배를 퉁퉁 치며 걷는 사람, 우리는 이 사람을 ‘뱃통’이라 부른다. 모두가 남을 의식하지 않고 열심이었다. 분수대 물속에 바위 한 개를 심어놓아 물을 마시는 비둘기의 모습이 아름답다.
새벽녘에 왔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아침 햇살이 제법 나뭇잎 사이로 황금빛을 뿜어낼 시간이 되면,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때에 오는 사람들은 운동보다는 도토리를 주우러 오는 사람들이다. 전북대학교 분수대 주변에는 약 50여 그루의 도토리나무가 있다. 이 도토리나무들은 하나 같이 어른 눈높이정도에 본래 줄기보다 더 두꺼운 생채기 가 있다. 그 상처에 나무의 진액이 모여 흉물스럽게 부풀려져 있다.
새벽녘에 온 사람들이 도토리를 모두 주워가 버렸으니 땅에 남아있는 도토리는 없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무를 두드려 도토리를 터는 일이다.
2년 전이었다.
도토리나무 생채기에 분노한 나는 전북대학교 관리인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돌이나 몽둥이로 나무를 찍는 사람 뒤로 가서 제법 큰 소리로
이거 뭐하는 짓이야?
하고 소리를 꽥 지르고 땅에 떨어진 것만 주워가라고 일침을 가했다.
나무를 학대하는 사람들한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내가 당신 허리를 한 번 휘갈겨 줄 테니 아픈지 안 아픈지 경험해 보시오. 도토리 묵 살 돈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차라리 내가 그 돈을 줄 테니 그러지 마시오.”
하며 3천원을 흔들어 보이면 대개는 그 짓을 그만둔다. A4 용지에
“아프니, 때리지 마셔요, 무식한 아저씨!”
라고 써서 나무에 붙여놓기도 하였다. 그 생채기를 사진 찍어 제목을 '탐심'이라 붙여 언론사에 제보하기도 하였다.
몽둥이를 나무위로 던지면 나는 반대쪽에서 주먹만한 돌을 던졌다. 사람이 있는 데 왜 돌을 던지느냐고 항의하면, 난 당신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빈정대기도 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입소문을 퍼뜨리기 위하여 획기적인 일을 하기로 하였다. 민방위 관련부서에 가서 성능 좋은 핸드마이크를 빌려왔다. 이튿날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도토리를 돌로 찍는 사람 옆으로 다가갔다.
짧으면서도 가장 크고 효과적인 소리는“야, 뭐하는 거야?”였다. 천둥 같은 소리에 나무를 찍던 돌을 놓쳐 자기 발등을 찍어버렸다. “아이쿠!”하며 발을 감싸려고 고개를 급히 숙이자 머리통이 도토리나무를 받아버린 일이 일어났다. 그 사람은 마치 다리를 다친 강아지처럼 멀리 뛰어가더니 반격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손에 핸드마이크를 들고 떠들어대는 나를 보고 대학교 관리인이 나와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은 나무를 돌로 찍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적어도 내가 서성대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전북대학교 관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무를 몽둥이로 치거나 발로 차면 과감히 소리치고 싶다.
“야, 이 사람아, 도토리 못 먹어 환장했어? 왜 나무를 못살게 굴어?”
작년 이른 가을,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남도 함양 상림공원에 간 일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최치원이 수로를 돌리기 위하여 조성한 공원이라고 했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그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휠체어를 밀고 공원을 거닐면서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아내가 주워들자, “줍지 마셔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책 나온 아주머니였다. 다람쥐가 먹어야 하니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기 고장의 소중한 자연 유산을 아끼는 그 태도가 존경스럽고 고향을 아끼는 그 마음이 부러웠다
도토리를 줍고자 큰 돌과 나무 몽둥이로 도토리나무를 찍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조물주는 필요에 의하여 섬을 만들고, 열매를 맺게 하여 멀리 여행하는 새들을 쉬게 하였으리라. 겨울이 되기 전 다람쥐과 동물들이 먹이를 장만할 수 있도록 때가 되면 도토리가 자연스럽게 빠지도록 조물주가 미리 설계해 놓은 것이리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면 도토리나무들이 또 얼마나 많은 수난을 받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토리나무는 해마다 묵묵히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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