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 그 생활로는 무언가 마뜩치 않았다. 한지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흔 살이란 나이를 잊고, 서울 상명여대평생교육원에 등록하고 주 1회씩 1년 동안 수강을 했다. 이듬해에는 상기호 오색한지공예 연구소에 한 해 더 다녔다. 전라도 소도시에서 서울까지의 내왕은 각다분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기에 해낼 수 있었다. 작업에 몰입할 때면 명상의 경지까지는 아니어도 생각을 뒤스르며, 웬만한 시름은 잠재울 수 있어 좋았다. 십여 년 하다 보니 여러 미술대회에서 특선, 입선을 십여 차례 하게 되었다. 그보다도 뿌듯했던 것은 그 때까진 서울에서 헌 살림만 가지고 와서 집안 분위기가 마치 날이 끄무레한 것처럼 칙칙했었는데, 한지공예품으로 장식하니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곱단한 작품을 보며 또 하나의 작품을 구상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그리고 친지들에게 요러나조러나 선물하게 되어 몹시 즐거웠다.
넓은 울안을 정리하랴, 땅과 벗하랴, 한지공예품에 열중하랴, 세월은 쏜살같이 잘도 지나갔다. 어느 날, 어제까지 멀쩡했던 친구, 지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는 게 아닌가. 세상에 나만 남은 듯, 내 갈 길도 멀지 않다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 질정 없이 늘 숙제처럼 안고 살아온 내 이야기를 글로 적어보고 싶었다. 막상 정리하려니 막막했다. 궁리 끝에 수필이 무언지도 모른 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에 서슴없이 수강신청을 했다. 그 때가 내 나이 79세였다. 주 1회, 백리길이 넘는 정읍과 전주를 버스로 오가며 강의를 들었다.
글쓰기는 우선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나를 가다듬는 일도 소중했다. 그리고 예전에 웬만한 것, 으레 건성으로 보아 넘기던 주변의 사물도 깊이 관조해야만 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늘그막에 걷몰다싶게 컴퓨터까지 배워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시골 그 집에서였다.
언젠가 친구가 그 집에 와 보고서,
“자네 영감이 자네한테 잘못하고 갔네. 이런데 집을 마련해주고 고생을 시키다니 쯧쯧…….”
딱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이가 살았다면 주변도 차차 예쁘게 꾸미려고 했었는데, 그리고 불편한 것 고쳐가며 살았을 텐데 미완으로 놓고 갔으니 어쩌랴. 여름이면 웬 지네가 그리 많이 나오던지, 이불 밑에서도 부엌 쟁반 밑에서도 때 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질리게 했다. 밭에다 제초제, 농약을 안 써서일까, 간혹 뱀은 말할 것도 없고 독사까지 눈에 띄면 정말 그 집을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넓은 터에서 끄덕하면 풀독이 옮지를 않나, 일을 보고 안할 수도 없지, 집은 여기저기 허술해서 자주 손볼 데가 생겨, 해가 갈수록 지겨운 생각에 언젠가는 떠나려 했었다. 드디어 2003년 그 집을 비워 놓고 서울 아파트로 이사하고 말았다. 난생 처음 아파트 생활은 더 못 견뎌 10개 월 만에 다시 짐을 싣고 그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 집을 고쳐 사는 게 서울 생활보다 나을 것 같아 돈을 몽땅 들여 리모델링을 했다. 그만하면 살 것 같았다. 모든 것 접고 그 집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했다. 한데‘삼밭 사자 이 빠진다'더니 솔개 까치집 뺐듯 한국토지 공사에서 그 지역을 '첨단과학산업단지'로 편입하는 바람에, 헐수할수없이 보상금을 받고 또 2008년에는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층은 6층이지만 고층 건물로 밀집된 아파트 생활은 여전히 마음 붙이기에는 삭막했다. 1년을 못살고 다시 시골 산 밑의 고층 건물이 아닌 아파트로 왔다. 어디든 아파트생활은 편리한 것 말고는 맥쩍게 싱겁기는 마찬가지다.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아닌 마당에 흙이 있는 단층집이 그리울 뿐이다.
며칠 있으면 시골 그 집이 헐린다고 한다. 지긋지긋 고생하고 살았던 집인데도 이렇게 허수할 수가 없다. 하늘이 시원스레 보이고, 달밤에는 앞마당 우긋한 수풀에 이슬이 촉촉이 내렸던 그 집, 가을밤엔 장광 이에짬에서 귀뚜리가 으밀아밀 울었던 뒤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나면 굴뚝에선 희부연 연기가 허공으로 풀풀 풀어져 나갔었다. 풀머리 산발한 듯 풀어 헤친 연기 저 너머 어둑한 서녘 하늘에는 눈물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지.
깊어가는 가을 해거름에, 울안 여기저기 수북이 덧게비쳐 있는 검불을 쓸어 모아 태우면 냇내는 왜 그리도 가슴을 메게 했을까. 서녘 하늘을 바라보면 낙조(落照)는 더 서러워하며 사라졌었지. 여름 밤, 풀 냄새 서리던 푸나무, 아기나무 때부터 키웠던 꽃나무들, 봄이면 씽글씽글 여염하게 꽃을 피웠었는데, 거실에서 바라보인 첩첩 주름진 앞산의 산색은 얼마나 그윽하고 묘묘했던가. 아침으로 나가보면 씨 뿌린 채소가 뾰조록이 예쁘게 올라오던 채마밭, 때 맞춰 푸지게 열매 맺던 매실, 살구, 자두, 단감, 대추, 무화과, 석류, 먹감나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긴 세월, 계절이 지날 때면 그 집 앞마당은 햇빛 가득히 내려앉았었다. 속절없이 가슴 술렁거려도 파문일랑 진득하게 잠 재워 주었던 곳, 세상의 비의를 바람에 젖어 날려 버리도록 소리 없이 영혼을 다독여 주었었지. 이제는 암암히 곡두로만 그려주는 그 집, 속속들이 맺힌 그리움만 남았다. 울타리 밑에 줄줄이 쭈그리고 있던 그 많던 돌멩이들, 주인 잃고 서름서름할 터인데 어디로 흩어질거나…….
(201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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