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면 먼저 단풍이 떠오른다. 단풍은 내장산 단풍이 아름답다. 노랑과 주황, 연둣빛의 다양한 색들이 어우러져 진빨강의 단풍잎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간간히 뻗어 나온 핏빛 단풍잎은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고등학교 동창생끼리 오랜만에 일본 북해도 관광을 다녀왔다. 북해도의 단풍은 붉은 단풍에 익숙한 내 눈에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하였다. 연두, 노랑, 담황, 주황, 주홍, 진홍 등 전체적으로 파스텔 톤의 단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색의 선명도도 좋았고, 색과 색 사이의 중간색들이 많아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형형색색이라는 말은 이럴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말 같았다.
북해도는 러시아 사람들과 옛적부터 영토분쟁이 잦았다. 또 전체가 화산섬이어서 곳곳에 온천이 발달되어 있었다. 활화산이라 지금도 군데군데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관광지로는 그만이었다. 화산폭발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전체가 불경기라서 그런지 일본인은 학생들의 현장학습 정도였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많았다.
화산섬이었던 제주도의 채소와 과일이 더 맛이 있듯이 북해도의 채소와 밭곡식은 훨씬 달고 사근사근하여 인기가 좋았다. 감자는 포근포근하고, 오이도 물기가 많으며, 당근 역시 습도와 당도가 좋아 그냥 먹어도 맛이 있었다.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여행을 하면 으레 면세점이나 토속상품점을 들르게 되는데 요즈음은 식당에서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북해도의 특산품인 돌을 깎아서 자석을 붙여 목걸이나 팔찌를 파는 곳이 있었다. 친정어머니께 선물로 사드리려고 얼마냐고 물었다.
“이만 오천 엔입니다.”
“이만 오천 원이에요?”
“예. 이만 오천 엔입니다.” 이만 오천 원이면 괜찮다 싶어 카드로 목걸이를 샀다. 차에 타니 친구들이 얼마 주었냐고 물었다. 이만 오천 원 주었다고 했더니 확인해보란다. 카드전표를 확인해보니 아차 거기에는 분명히 25,000￥라고 적혀 있었다. 버스가 떠나기 전에 급히 물건을 취소하는 웃지 못 할 사건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소식을 하여 오래 산다고 하는데 물건 값이 너무 비싸 먹고 싶어도 못 먹어서 소식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을까? 가장 작은 단위가 삼백 엔, 과자나 아이스크림 한 개에도 우리 돈으로 사천 원 정도이니 생각해보고 먹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일본 여행이 거의 그렇듯이 저녁마다 피로를 풀어주는 온천이 있어 요즈음 무릎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딱 알맞은 여행이었다. 특히 오오누마 프린스 호텔의 온천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시 한 번 갈 기회가 있다면 꼭 가보고 싶다. 이유는 노천온천의 풍광 때문이었다. 통유리로 된 앞 유리에 비친 단풍과 일본식 정원, 물가의 동물 형상의 네온사인들……. 밤에는 은은한 조명으로 피곤에 지친 우리의 심신을 풀어주더니 아침에는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우리를 반긴다. 멀리 보이는 이름 모를 산등성이의 하얀 눈발도 한 몫을 더한다.
섬의 특성상 게와 다시마가 유명하여 상점마다 다시마를 이용한 각종 반찬과 과자 종류를 개발하여 한국인들의 발길을 유혹하였다. 호텔에서는 음식도 종류가 많고 풍성하여 만족한 여행이었다. 친구 하나는 뷔페식당에서 게만 두 접시를 먹어서 웃음을 자아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출렁이는 바닷물은 아이누족의 애환을 말해주는 듯했다. 미국에 인디언이 있다면 북해도에는 아이누족이 있다. 명치유신으로 개발에 눈뜬 일본 내국인들은 사냥과 고기잡이로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아이누족의 작은 행복을 깨버렸다. 지금은 강제로 보호구역으로 밀려나 민속무용이나 토산품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자연을 내 나라 내 땅이라고 우기며 금을 그어놓은 인간들의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각 나라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고 식민지화하는 인간들의 욕망을 반성해 보았다.
북해도의 겨울 사포로 눈꽃 축제가 유명하다지만 북해도의 가을은 단풍이 어우러진 산과 화산, 온천과 푸짐한 식사가 있어 다시 한 번 오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지금쯤 북해도의 가을은 더욱 깊어져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이 오는 이즈음에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다가온 북해도의 가을이 벌써 그리워진다.
(201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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