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김영옥
ㆍ작성일	2010-11-27 (토) 10:57

ㆍ추천: 0 ㆍ조회: 2795

살고 싶어라
살고 싶어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김영옥

의료보험공단에서 검진을 받으라는 안내장을 받고도 몇 년을 가지 못했다. 밤늦게 내일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자는 동갑내기 친구의 전화가 왔다.

"이제 80이 가까운 나이에 무슨 검진이야? 그럭저럭 살다 가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히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가겠노라고 했다. 요즘 부쩍 허연 머리에 약봉지를 들고 비틀거리며 오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남편도 나이 80에 폐암이라는 병마가 선전포고령을 내리자 기어이 이겨보겠다는 강한 의지로 항암주사와 2년여 싸웠다. 주사를 맞으면서 좋다는 약이나 음식은 모두 동원했다. 훌륭한 의사가 좋은 시설로 치료를 해보지만 나이에는 한계가 있는지 강한 정신력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사그라지는 숯불처럼 점점 쇠약해져 갔다. 기울어지는 사람을 도저히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어 가까운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3층부터 6층까지의 입원실 중 6층엔 남녀 2반씩 40여명의 환자들이 모습만 사람이지 하나같이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는 불쌍한 분들이었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거의 의식조차 없이 목숨만 유지하는 걸 보면서 살아 있다고 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럽다. 남편 바로 옆 환자는 눈만 껌벅거릴 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이다. 코로 줄을 넣어 위장으로 죽물을 넣고 주사만 맞으며 10여년을 살고 있단다. 모두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싶었다. 낮에는 매일 가보지만 남편을 두고 돌아서는 내 가슴은 짠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종합병원에 검사예약을 해놓은 날, 내 생각엔 가지 말았으면 싶었지만 그래도 살아볼 마음인지 밤에 죽 한 모금 먹고 아침도 굶은 사람이 휠체어에 의지하여 병원으로 갔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 안을 이곳저곳 다니며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오후 늦게 요양병원으로 돌아온 남편은 반 초죽음이 되었다.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애처로웠다. 그 뒤 남편은 별 통증도 없이 ‘인명은 재천’인지 입원한 지 20여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54년을 함께 살았건만 혼자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항상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패기가 넘치던 그였는데 나이 들고 병약해져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돌고 다녀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에 딸 같은 의사를 구세주처럼 여기며 매달렸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종합병원 대합실은 갖가지 사연을 안고 찾아온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섣달대목 장속처럼 붐볐다. 하루라도 아프지 않고 더 살아보려고 있는 돈 없는 돈 써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리라.

몇 백 명의 병원종사원들도 각기 맡은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해 나간다. 큰 고목나무 아래서 불개미들이 살려고 나부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론 힘들고 짜증날 일도 많겠지만 보수를 받아 살아가기에 고달픈 일을 즐겁게 하리라. 서로가 살기 위한 거대한 삶의 현장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우리는 살려고 세상에 태어났기에 오래 살고 싶어한다. 영원히 살려는 마음에서 많은 종교도 생겨나고, 죽어도 세상에 살다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묘지까지 만들지 않는가. 하물며 길가에 잡풀도 밟혀 몸이 부러져도 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옛날에 앞을 못 보는 시어머니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여 듣기 민망한 며느리가 밀가루를 봉지에 넣어 이걸 잡수시면 잠자듯이 가신다며 주었더니 돗자리 밑에 감추어 놓고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실감난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사회 문제다. 남을 위해서도 아닌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 못해 쉽게 생을 포기하거나, 내가 살려고 혀와 무기를 이용해 남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내 생명이 귀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 우리 모두에겐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고귀한 생명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날로 늘어가는 노인들을 돌보기 위해 요양병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 우리나라에도 3.500개가 넘는다는 보도다. 어찌 보면 노인들이 오래 살면서 젊은이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셈인지도 모른다. 서로 돕고 사는 격이니 이제 노인들을 푸대접이 아니라 왕 대접을 해야 하리라. 몸이 건강해야 자신감이 생기고 세상살이가 아름답고 재미있으련만 무릎에 인공관절수술을 받은 나는 요즘 사는 맛이 소태맛이다. 하지만 나도 건강이 좋아져서 잘 걸어 다닐 실낱 같은 희망으로 고통을 참는다.

지금까지 내 나름대로 잘 살겠다고 억척을 떨었건만 해놓은 일도 없이 나이만 팔십에 가까워지니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 남은 생이 두렵다. 건강관리를 잘하여 주어진 수명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 하고 온 검진 결과에 아무 탈이 없기를 기대한다.

(201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