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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최정순
ㆍ작성일	2010-12-18 (토)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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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의 추억
팽이의 추억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최정순

동생의 호주머니는 항상 뻥뻥했었다. 세탁을 하려고 주머니를 털면 유리구슬에서부터 노끈나부랭이, 고무줄도막, 지남철조각, 구멍 뚫린 엽전 등 심지어 어머니가 애타게 찾던 아버지의 윗저고리 단추까지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동생을 어머니는 꾸짖기는커녕 오히려 두둔하셨다. 사내는 모름지기 봉창이 두둑해야 처자식을 굶기지 않는단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세탁물을 챙기면서 속설을 믿었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피식 웃곤 한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셋째 남동생은 누가 봐도 똘똘한 개구쟁이였다. 배코머리는 팽이처럼 동글동글했으며 쥐눈이콩처럼 작은 눈은 빤짝거렸다. 옷소매는 코를 닦아서 반질거렸고, 손톱은 닳아서 깎을 것이 없었다. 어찌나 몸놀림이 빨랐던지 이름대신 도롱태라고 불렀었다.
숙제는 꼭두새벽에 얼렁뚱땅 해치우고는 딱지나 제기를 만들어 만만한 누나와 놀자고 퍽이나 귀찮게 굴었었다. 걸핏하면 나를 앞세워 이것저것 해달라고 졸라대며 떼를 썼다. 한번은 팽이채 감을 찾는다고 내 등을 밟고 올라서서 시렁에 놓인 반짇고리를 내리려다 그만 등잔을 엎질러 사단이 난 일도 있었다. 그뿐인가 도랑가에서 메뚜기를 잡다가 새 고무신짝을 떠내려 보낸 일이며, 어머니 저고리고름으로 팽이채를 만들었다고 야단을 맞을 때마다 덩달아 나까지 싸잡아서 꾸중을 들어야했다. 나 또한 동생을 내 손 부리듯이 아궁이에 불을 지펴라, 몽당비로 개똥을 치워라, 요강을 씻어 방에 들여 놓으라며 궂은일을 퍽이나 시켰었다. 그래도 동생은 싫은 기색 없이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와주었다. 개 눈에는 귀신도 보인다던데 하필이면 개가 짖어대던 한밤중에 뒷간 가는 일이 무서워 동생을 깨웠던 일이랑, 아침 눈뜨기 바쁘게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으로 내달려 팽이치기를 했던 지난 일들이 떠올라 동생을 더욱 그립게 한다. 틈만 났다하면 땅뺏기, 자치기놀이를 했다. 요술처럼 구르는 구슬치기며 나비처럼 제기가 발끝에서 신나게 날아오르는 제기차기도 즐겼지만 뭐니뭐니해도 동생이 잘하는 것은 팽이치기였다.

허공에 던져진 팽이가 채에서 풀려나 휙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지는 순간 중심을 잡고 꽂히면 돌기 시작한다. 휘두르는 팽이채놀림에 따라 팽이는 써레질을 하듯 종횡무진 자유분방하게 잘도 돌았다. 팽이채놀림은 기술이었다. 마치 승마선수가 달리는 말 엉덩이를 가끔 채찍으로 치듯이 말이다.
동생은 또 여러 개의 팽이를 한꺼번에 살려놓고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파트별로 연습을 시키듯 돌려가면서 치기도 했다. 하굣길에선 또래 애들과 팽이 싸움도 부쳤다. 팽이끼리 부딪치면서 스파크가 튀었다. 창과 방패를 든 병사가 지휘관의 작전지시에 따라 움직이듯이 팽이는 팽이채의 놀림에 따라 온몸을 던져 싸웠다. 팽이채놀림을 어떻게 익혔는지 강하게도 쳤다가 약하게도 쳤다가 밥을 먹이듯 팽이를 살살 달래면서 팽이채를 능란하게 조절할 줄 아는 동생은 팽이싸움만 하면 이겼다.
동생의 팽이에겐 자신을 다스리는 팽이채가 있어서였다. 중심을 잡는 힘으로 학대하리만치 자신을 호되게 후려칠 때만이 팽이는 돌았다. 채로 맞으면 맞을수록 잘도 돌았다. 그러다가도 잠시 팽이채가 휘두름을 멈추면 팽이는 중심을 잃고 서서히 까무러졌다. 동생은 까무러져가는 팽이를 다시 살리려고 마구 팽이를 쳐댔다. 팽이가 일어설 때까지
“너, 죽을래? 멈추면 죽어.”
“그래? 돌아라, 돌아.”
중얼거리며 쳐댔다. 그랬건만 팽이가 일어서지 못하면 팽이채가 나빠서라며 또 다른 팽이채로 팽이를 닦달해댔다. 그러자니 동생의 호주머니는 팽이채 감으로 항상 뻥뻥했으리라.

동생은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새벽으론 신문배달을 하여 학비며 잡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었다. 가까스로 어려운 역경을 딛고 졸업한 뒤 손꼽히는 방적기사가 되어 일본, 수단, 이란, 등 방적기술을 요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야말로‘지구를 누비는 남자'가 되어 팽이처럼 바삐 돌았다. 풍을 맞은 어머니의 약값이며 생활비를 동생이 얼마쯤 벌어 들였으니, 봉창이 두둑해야 처자식을 굶기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속설은 맞아떨어진 셈인가.

그런 개구쟁이 동생이 저 세상으로 떠난 지 벌써 수삼년도 넘는다. 그 신나게 돌던 팽이! 아침부터 동생이 팽이를 쳐대는 걸까. 뱅뱅 소리를 지르며 세탁기가 돌고 있다. 오늘을 여는 소리다. 채찍이 없으면 서지도 달리지도 못하는 팽이, '나'라는 팽이는 지금 잘 돌고 있는 걸까? 나를 잘 돌게 하는 팽이채는 과연 무엇일까? (2010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