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사람은 언제나 한마음이다. 마음이 불편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많으면 구불구불한 길을 갈 것이며, 마음이 편안하고 긍정적이면 숲속 새소리가 들리는 평온한 길을 갈 것이다.
나는 길을 사랑한다. 많은 길 중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만큼 인생에서 매력과 희열을 맛보는 일은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고속도로 길가의 마을과 철따라 변하는 자연 풍경을 보면서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따뜻한 김이 나는 하얀 밥을 엄마와 함께 먹으며, 나의 철없는 생각과 행동을 잔잔한 미소와 고운 눈빛으로 맞장구 쳐 주시는 그곳으로 갈 때 내 심장 소리는 즐겁게 뛰놀았다. 엄마는 거실에서 지금쯤 오고 있을 딸을 생각하며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뭐하러 와? 고생하게.”
활짝 웃으며 반기시는 엄마는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곱고 예쁘셨다.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단정히 빗고, 옅게 화장을 하고, 분홍색 가디건을 입으신 모습이 사랑스런 소녀 같았다. 그러나 간밤에 뒤척이신 병색 짙은 엄마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렸다.
“괜찮아, 엄마 덕분에 여행 왔어.”
엄마와 함께 먹는 밥은 조금만 먹어도 배가 먼저 불렀다. 입맛을 잃으신 엄마는 딸이 준비해온 음식과 간식을 드시려고 애쓰시며, “맛있다, 맛있어.”하며 칭찬하셨다. 딸 정성에 더 드시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다정한 눈빛으로 표현했다. 그 고마움은 가정과 직장에서 성실하게 생활하는 딸에게 ‘잘 할 수 있어’라고 용기를 주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광주로 가는 겨울 길은 엄마를 닮았다. 눈이 벚꽃처럼 내리는 날은 운치가 있어 음악에 맞춰 콧노래까지 부르는 여유까지 즐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휘몰아치는 폭설을 만날 때는 ‘오늘 저와 함께 하시길’ 하며 신의 가호를 빈다. 산과 산들이 어깨동무하며 내린 눈을 친구 삼아 고고하게 앉은 산 능선을 바라보며 운전할 때는 넓은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 볼 수 있는 배려심을 배울 수 있었다. 겨울 들판은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준 엄마처럼 헌신과 인내가 그대로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엄마에게 가는 길에 내리 쬐는 태양과 폭우가 어찌 빠질까, 그 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특히 정읍과 장성 사이의 도로는 느닷없이 게릴라성 비를 퍼부은 다음 여우 햇살을 반짝 내민 얄미운 얼굴을 가진 마법 같은 길이다.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뜨겁게 불타오르는 가을산과 노을이 접점을 이루는 광경을 볼 땐,
“사람은 자기 욕심대로 살 수 없으며, 자신의 처지에 항상 순응해야 한단다.”
엄마의 말씀이 떠올라 일상에서 모든 걸 감사한 마음과 겸허한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엄마가 남겨진 생의 짧은 시간 속으로 빠르게 가고 있다는 걸 나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다.
“보고 싶은데 올 수 있어?”
엄마의 작은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자, 나는 아련한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괜찮아, 엄마. 갈게.”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고, 치료를 받는 동안 나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생기가 돌아 웃으신다.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엄마의 존재감이 더 절실해졌다. 그래서 가끔 투정을 부리고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 엄마 심기를 불편하게 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날, 자신이 실망스럽고 후회스러워 마음 아픈 적도 있었다. 엄마의 꾸지람과 따끔한 일침은 생활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며, 엄마에 대한 사랑이 깊어만 갔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기다리는 날과 만나는 날이 길지 않다는 것을…….
엄마는 딸이 전주 집으로 가는 길이 걱정되어 빨리 가라하셨다. 날이 어두워지면 운전이 위험하니 빨리 가라 재촉하신 걸 보니. 엄마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그 마음을 감춘 채 의연한 모습을 보이셨다. 병실문은 서서히 닫혀 지고, 그 문틈 사이로 엄마의 슬픈 표정을 본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서러움에 젖어 울컥했다. 아버지는 허겁지겁 서둘러 가는 딸에게 언제나 한결같이
“용돈해라. 그리고 와 주어 고맙다.”
하시며 나직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배웅하신다. 아버지의 모습은 겨울날 빈 가지만 남은 나무와 비슷하다. 아버지를 보면 차마 뗄 수 없는 발걸음도 있었다. 아버지는 극진한 사랑으로 엄마를 돌보시고 그 사랑에 엄마는 평화로웠다. 엄마는 비록 병마와 싸우시며 고통과 불안의 나날들을 수없이 견디며 아버지 곁에서 여자로서 행복한 인생을 사셨다.
지금 광주로 가는 길은 고독하다. 겨울바람에 벌거벗은 나무들이 서로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길이다. 멀리 있는 겨울 산 잔설이 고즈넉한 고요로 다가온다. 올 초여름 엄마는 폭우와 폭설만큼 긴 투병 생활을 마치셨다. 이제 엄마가 계신 곳은 아버지가 손수 다듬고 가꾼 양지바른 곳이며, 푸른 소나무와 새가 노래하는 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 그곳에서 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엄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책장을 넘기듯 옛 이야기가 되어 도란거리는 그곳으로 간다. 엄마에게 가는 길은 지혜를 찾아 가는 길이며, 삶이 힘들 때 부드러운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자애로운 엄마의 눈빛을 만나는 길이다. 고요한 침묵과 깨우침이 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내 영혼의 자유를 배우는 여정이다. 엄마에게 가는 길은 내 인생의 환희이며, 기쁨이다. 맑은 호수처럼 잔잔한 엄마가 보고 싶다.
(2010.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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