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조윤수
ㆍ작성일	2010-12-20 (월) 20:15

ㆍ추천: 0 ㆍ조회: 2542

손목이 가벼운 사람
손목이 가벼운 사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조윤수

고운 낙엽들이 깔려 있는 잔디밭에서 차를 마셨다. 차 맛이 아주 달보드레하였다. 분명 연잎차를 우려서 보온병에 담아왔는데, 재스민 차 맛이 나다니……. 전라북도 새청사의 정원이었다. 날짜를 잘 못 알고 허둥지둥 달려왔다가 허탕을 친 기분을 고르고 있었다.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신기해져서 휘 돌아보았다. 하늘 호수에 빨간 단풍잎이 떠 있었다. 천지간에 단풍잎과 낙엽들만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석별의 정을 나누자는 춤사위인가. 하나하나 눈을 맞추다가 더러는 손을 마주 잡고 왈츠를 흉내 내며 담장 가까이 가자 감탄이 절로 터졌다.

구골목서 나무들이 담 벽을 이루고 있는데, 가지마다 하얀 꽃숭어리가 이슬방울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모양새로 꽃망울들이 가시 돋은 잎 가운데서 그렁거렸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으니 그렇게 향기를 멀리 보냈던가. 흔히 만리향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예상하지 못한 행복감에 젖어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잊었다.

이 가을 들어서 벌써 세 번이나 날짜를 잘 못 알고 허탕 친 일이 있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미술관에 가는 날인데 월요일에 가기를 두 번씩이나 하지 않나, 또 다른 일에서도 그랬다. 시간 손해를 본 대신, 기분 좋은 가을의 산길을 돌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렸다. 건망증이 생겨서라기보다 너무 열중하다 보니 순간의 착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날 하루 달콤한 향탕에 담겨 있었다.

마을에 시계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바빠졌다. 시계가 없을 때는 자주 모여서 같이 일하고 같이 놀았다. 시계가 없어도 태양은 늘 그대로 뜨고 지건만 사람들은 왜 시계 안에 태양을 가둔 것일까. 달력을 보면서 날짜를 세고 시간을 따지다보니 각자 바빠서 아무 때나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 때때로 시간과 공간이란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때가 있다. 이제 그리해도 행복한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일까.

달력을 자주 쳐다보며 날짜를 세고 하루에도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태양도 시간도 망가질 리 없지만 기계는 망가진다. 사람들은 망가진 기계를 고치기도 바쁘고 유행 따라 희한한 모양의 기계를 고르기에도 바쁘다.

부엉이 시계가 유행한 적도 있었다. 고장이 자주 났다. 산 속에 살아야 할 부엉이를 시계 집에 가두었으니 온전할 리가 없었다. 시계의 모양 따라 시간도 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타임머신을 발명할 수는 없을까. 하긴 세상을 다 담은 듯, 시공간을 한 곳에 담은 듯한 손안의 네모난 요술쟁이가 있지 않은가? 순간의 텃치가 엉뚱한 세상으로 데려가기도 한단다. 새로운 기계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익히기에 또 사람들은 바쁘다.

시계를 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나는 시계가 필요 없어 손목이 늘 가볍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인가 보다. 가끔 요일을 잘 못 알고 실수할 때가 많다. 이 가을 학기에는 공부할 과목이 세 가지나 되었으니 그럴 만 하였다. 그래도 알고 결석한 날 외에는 잘 마칠 수가 있었다. 시계와 날짜를 세지 않아서 허탕 친 것 같았지만 대신에 다른 즐거운 일들을 볼 수 있는 소득이 의외로 많았다. 헛일 한 것 같은 그 시간이 더 많은 시간이 되어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때 행복하다는 말을 쓰는 것일까. 길도 시간도 잃는 것이 얻는 것이기도 했다. 의무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보너스인가 보다.

시계를 보는 시간에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많아지니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현대 사회가 복잡하여 직업도 다양해지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시계가 없어도 태양이 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태양이 잠자러 갈 때 사람도 따라 잠을 자던 때와는 달라졌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른 생체 시계를 몸에 지니게 되었기 때문에 고유의 생체 리듬이 생긴 것이다.

아침 일찍 노래하는 종달새 형이 있는가 하면 늦게까지 일하고 아침에 늦잠 자는 올빼미 형도 있다. 그 중간형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글공부를 하다 보니 올빼미 형이 되었다. 그래서 시계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시간에 얽매여 외부의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정작 알아야 할 자신의 몸의 흐름이나 자연의 흐름을 잃게 되는 수가 많다. 나의 생체 리듬을 잘 읽기 위해 바깥 소리를 절제해야 할 때가 많다. 내 생체 시계는 내 감각이 관리한다. 음식이 필요하다거나 운동이 필요하다거나 등등. 감각의 말을 잘 듣고 내 오장육부와 기(氣)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향 맑은 기운을 잃지 않기 위해서 차 마시는 시간이 나를 조율하는 때이기도 하다. 고요하게 나를 지켜보아야 하는 시간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그전에는 집안에 시계가 많았는데 차례로 도망가고 이제는 벽시계 하나뿐이다. 시계가 아마 자주 쳐다봐 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릴까 걱정이다. 우주 공간 어디쯤 날아가면 시간이 끊어진 공간이 있다고 한다. 나에게 시간을 건너뛰는 착각이 일어나는 때는 꼭 그런 순간이지 싶다. 연말연시란 분주함도 없는 세상 너머 세상엔 경이로운 장면과 만나는 축복이 늘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행복을 찾아다닐 시간이 없어 가지려고도 않는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행복해지는 것이 의무이다.” 라고 말한 헤르만 헷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란 것을 이제야 알았나?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서 단지 행복해져야 한다는 의무를 실현하는 일이 세상 사는 일이었다.

(2010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