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례 운조루(雲鳥樓) 공식 홈페이지 ▒

ㆍ작성자	양영아
ㆍ작성일	2011-01-10 (월) 04:17

ㆍ추천: 0 ㆍ조회: 2215

늙은 소녀의 시
늙은 소녀의 시

-영화 ‘시’를 보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양영아

영화 ‘시’가 칸느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시처럼 잔잔히 흐르는 영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시처럼 음미하며 감상하는 영화, 관객의 생각을 머물게 하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그림으로 비교한다면 한국화 같은 영화라고 할까? 여백이 많아 관객들이 생각하고 숨 쉴 공간이 많았다. 야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좋았다.

나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감독의 의도를 눈치 채지도 못한다. 그냥 내 나름대로 느낄 뿐이다. 어차피 관객들에게 내맡겨진 시라면 난 내 나름대로의 시를 쓰겠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여학생의 시체가 떠내려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 여학생의 엄마는 실성한 듯 허둥지둥 딸의 흔적을 더듬으며 온몸으로 슬픔을 감내할 뿐 통곡도 하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 미자는 외손자가 중학교 3학년 집단성폭행범 여섯 명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그러나 손자의 이불자락만을 끌어 댕기면서 “왜 그랬어?”만 되뇔 뿐 통곡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통곡이란 의미가 없다. 그저 관객들이 크게 느껴 가슴 아파하면 되는 것이다. 조용히 여백을 두고 관객과 함께 써 내려가는 시였다.

반신불수가 된 늙은 회장의 목욕을 시켜 주는 가난한 간병인 미자의 보살핌에 회장은 사그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느끼며 마지막 남자 구실을 한 번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길 간청한다. 미자는 분개하나 며칠 뒤 인간애에 이끌려 결국 회장의 마지막 청을 들어준다. 이건 오락도 쾌락도 아닌 본능의 발로, 오직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의미일 뿐이었다. 결코 돈 때문에 노 회장의 부탁을 들어준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여학생을 자살하게 한 자기 자식들을 질타하기는커녕 처벌만을 면하기 위해 사건 은폐에 급급한 부모들의 작태. 합의금으로 해결하려는 이기적인 아버지들의 집단 행위는 부도덕한 이 시대를 고발하는 일이다. 합의금으로 할당된 오백만원을 구한다는 것은 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재촉하는 성폭행범 아버지들의 성화에 그녀는 회장을 찾아간다. 회장에게 성(性)봉사한 미자의 행동은 순수한 인간적 동정이었다고 본다. 외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할 길이 없는 그녀가 부자인 회장을 찾아간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이 영화에서 시문학강좌 강사로 우리 고장 섬진강 시인 김용택 씨가 출연했다. 66세의 순수한 늙은 소녀 미자가 우연히 이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된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화려한 꽃무늬의 옷과 멋스럽게 늘어뜨린 머플러와 하얀 모자를 즐겨 쓰는 멋쟁이 할머니! 뒤늦게 시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면서 생활고도 손자의 빗나간 성폭행범죄도 모두 흘려보냈다.

그녀는 대자연의 밀어를 찾기 위해 한없이 방황했다. 나무와 꽃을, 하늘과 공기를, 그러한 그녀가 곧 시 자체였다. 시 강좌 마지막 날까지 시를 쓴 사람은 오직 미자 할머니뿐이었다. 마지막 강의실엔 미자의 시와 꽃다발만이 미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시는 고통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고통에서 온다고 했다. 정말 미자의 시는 고통 속에서 핀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

짓눌리는 고통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미자! 그녀의 순수함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그녀는 외손자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면서 마지막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손자를 잡혀가게 한 것은 죄인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그녀의 올바른 가치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호기심에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많다. 친구들과 장난으로 차를 훔쳐 질주하는 스릴을 맛보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하고, 남의 물건도 재미삼아 훔쳐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대부분 타이르고 바른 길로 인도하면 제자리로 돌아와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일이 없게 된다. 다만 기회를 놓치고 범인이 되어 법의 심판을 받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전과자가 되어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착하게 살 수 있는 성품을 지녔기에 누구든 초범일 때 선도해서 바르게 살도록 하면 정말 좋겠다.

할머니의 딸이 돌아와 어머니와 아들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첫 장면에 나왔던 그 강물이 넓게 흘렀다. 소녀의 시체가 떠내려 왔듯이 미자의 시체가 떠내려 올까봐 조마조마했으나 그냥 물만 무심히 흘렀다. 끝없이, 덧없이. 마지막 역시 관객들이 상상의 날개를 펴도록 끝맺음을 맡겼다.

미자는 어디로 갔을까? 알츠하이머 초기증세였던 그녀는 손자를 잊었을까? 아니면 시상을 떠올리기 위해 어느 숲속을 거닐고 있을까? 소녀를 위해 '아네스의 노래' 라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죽음을 택했단 말인가? 마지막 강의 시간에 그 시 한 편과 꽃다발을 놓아두고 그녀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싫다! 죽었다는 끔찍한 생각은 하기 싫다. 그냥 흐르는 게지. 물이, 강물이 흘러갈 뿐이라고 생각하겠다. 덧없는 세월과 세파의 험상궂음도 그냥 흘러가는 물속에 모두 흘려보냈을 것이다.

인생은 60부터! 장수 노인들이 점점 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여생을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다. 미자 할머니처럼 시어를 찾으러 다니는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새싹의 발돋움에도 눈물을 흘리고 꽃망울의 벙긋거림에 가슴 뛰노는 사춘기도 아니지 않은가. 노년의 감성은 메마른 가지에서 수액을 짜내는 노력보다 더 힘든 일이다. 미자 할머니를 칭찬하며 나도 그녀처럼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오늘도 수필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다.

(201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