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의 영약(靈藥)이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마음이 심란할 때 여행길에 오르면, 모든 시름을 잊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여행처럼 건실한 수행법도 드물다. 몸이 부실하여 거동이 불편한 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다녀오면 몸이 가볍고 마음이 밝아질 것 만 같다.
봄이 무르익은 4월 하순이었다. 만발하던 꽃들이 화려한 꿈을 뒤로 한 닢 한 닢 날리며 작별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경로당에서도 떠나는 봄날이 아쉬울세라 좋은 날을 잡아 여행길에 올랐다. 꼭 참석해 달라는 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나도 동참하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반반으로 구성된 일행은 45인승 관광차에 초만원을 이루어 보조의자가 5개나 필요했다. 양보를 미덕으로 알고 처신하던 나는 몸이 부실하다는 핑계로 안정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북으로 머리를 돌린 차는 쏜살 같이 달렸다. 스쳐 지나는 창밖을 바라보니 흘러간 지난날들이 꿈결처럼 떠올랐다. 달리는 차만큼이나 빨리 달리는 세월이 아쉬웠다. 이 아름다운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고 겨울도 왔다가 섬광처럼 스쳐 지날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세월 따라 인생도 어김없이 달려가고 있다. 달리는 차의 속력에 인생을 겹쳐 생각하다 보니 차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향기수목원>은 경기도 오산시 수정동에 있다.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이란 주제로 경기도가 주관하여 조성한 보물 같은 동산이다. 10만 평이나 되는 넓은 면적에 학술적, 산업적 연구를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지명을 따라 습지생태공원, 수생식물원, 호습성식물원 등 1.683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엮은 조화로운 명소다. 인간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인간이 꾸민 환경의 아름다움도 높이 평가할 만한 시설이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일행의 뒤를 따라 힘겹게 걸으면서도, 낙원을 거니는 신선의 마음으로 수많은 꽃과 나무를 바라보며 끈질기게 뻗어나는 생명의 환희를 느꼈다.
다음 행선지는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석탄박물관이었다. 예전에 탄광촌이었던 석탄산업의 산 교육장이다. 각종 탄광시설 및 광물표본 외 2.500여 점의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안내의 장과 석탄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탐구의 장이 있다. 체험의 장에는 모의갱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2층 모의갱도 입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올라 스위치를 눌렀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깜깜한 땅속으로 내려갔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 온몸이 오싹했다. 지하 400m까지 떨어지듯 내려가는데 그 시간이 길게도 느껴졌다. 사실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며 그 시간은 단 1분이라는데, 누구나 착각할 정도의 구조였다. 그 공포의 순간이 지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모의갱도가 나왔다.
갱도 내부에는 광부들의 작업과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부들의 작업현장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천공작업, 전기발파, 폐석처리, 채탄작업, 운반 순서로 설치된 작업과정인데 당시 광부들의 열악한 작업조건을 알 수 있었다. 곡괭이로 탄을 찍어 캐는가 하면, 한 광부는 쇠말뚝을 잡고 한 광부는 망치로 그 말뚝을 쳐서 탄을 캐는 모습도 보였다. 망치로 내려치는 광부가 조금만 실수를 하면 쇠말뚝을 잡은 광부는 박살이 날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전신을 석탄가루로 뒤집어 쓴 채 그 갱도 안에서 하루 8~10시간 일을 했다니,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열악한 시설들은 광부들의 생명을 노리는 악마의 소굴 같았다. 그 열악한 조건에서 석탄산업의 맥을 이어온 석탄캐던 사람들이야말로 나라 발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부터 우리 생활에는 취사와 난방용 연료가 필수자원이었다. 1950년대 이전에는 연료를 산에서 충당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치산(治山)에 소홀히 하고, 산에서 약탈연료를 채취한 탓에 산은 모두 민둥산이 되었다. 민둥산은 국토의 황폐화를 불러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홍수가 나고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석탄산업으로 연료가 연탄으로 대체되면서 산이 푸르러졌다. 석탄에 이어 기름으로 대체된 연료가 지금은 가스로 바뀌었지만, 푸르고 울창한 산을 가꾼 공은 역시 생명을 담보로 피땀 흘려 석탄을 캐던 광부들에게 돌릴 일이다.
석탄박물관 입구에는 열악한 갱도에서 석탄을 캐다 희생한 사람들의 명복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석탄을 캐다 갱도가 무너지거나 몸이 상해 순직한 사람들의 위령탑이다. 무너질 것 같던 위험한 갱도, 탄가루에 숨쉬기도 어렵던 갱도에서 묵묵히 일하던 광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들의 숭고한 근로정신과 애국혼이 아니고서는 그 죽음의 갱도에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 느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행복하게 살 권리를 안고 태어난다. 단 한 번뿐인 인생도 누구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그때 석탄을 캐던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딸린 가족의 부양의무도 있었겠지만, 나라의 형편에도 그 일을 숙명적으로 감당해야겠기에 생명을 담보로 일을 했던 것이다.
지금 온 산하는 푸르고 삼림이 울창하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이 좋은 환경에서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고 있다. 이 좋은 세상을 꾸미고 간 그 때 그 사람들, 석탄을 캐던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공지사항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11대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