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공식 홈페이지, 운조루닷컴!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원등록
문화 류씨 이야기
운조루 소개
추천 자료
홈지기 소개
전체방문 : 15,231,009
오늘방문 : 1258
어제방문 :
전체글등록 : 6,272
오늘글등록 : 2
전체답변글 : 162
댓글및쪽글 : 2996


  Unjoru?
운조루 소개
ㆍ추천: 0  ㆍ조회: 13649      
운조루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
운조루에 대한 소개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1776년(조선 영조 52년)에 건축한 건물로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는 경상북도 안동태생으로 낙안군수를 비롯하여 주요 지방 수령과 대규모 국가 건축의 책임자를 지낸 유이주라는 사람이 건축적 기본소양과 재력을 받침으로 창건한 것으로 금환락지(천정 에서 옥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의 명당에 99칸의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여 살게 한 곳이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ꡒ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ꡓ이라는 뜻과 ꡒ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ꡓ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데 ꡒ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ꡓ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온 것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 만한 돌거북이 출도 되었는데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중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이주에 의해 창건된 운조루는 7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완공될 만큼 규모가 대단하였는데 조선시대 대군들이 집을 지을 수 있는 69칸을 넘어 99칸의 규모였다. 일부에서는 운조루 창건 당시에는 1백칸을 족히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200여년의 새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노후되는 오늘날에는 60여칸만이 전해진다
 
운조루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 (한국문화답사회 인용)

구례구에서 경남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난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토지면 오미리에서 넓은 들을 만난다. 멀리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한 기운이 소백산맥이 지리산 왕시루봉을 빚고 그 산 줄기가 흘러와서 섬진강을 만나는 강가에 만들어 놓은 '구만들'이다.
 
토지면의 토지(土旨)라는 이름은 원래 금가락지를 토해 냈따는 뜻의 토지(土指)였다고 한다. 옛날에 가락지는 여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정표로서 성행위를 하거나 출산할 때만 빼는 것이다. 여기서 가락지를 빼놓았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을 뜻한다. 그래서 토지면 오미리 일대는 금환락지,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이라 알려져 왔다.
 
이처럼 좋은 터이니 혹자는 이곳을 청학동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8년에 70가구 350명이던 인구가 1922년에는 148호 744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운조루(雲鳥樓)는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유이주는 어려서 문경새재를 넘다 호랑이를 만나자 채칙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쫓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힘이 세고 기개가 뛰어났던 인물이다. 당시 마을사람들도 운조루의 터가 길지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바위가 험하여 집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이주가 전라도 승주(지금의 순천)에서 낙안군수로 재직하여 있을 때 "하늘이 이 땅을 나를 아껴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고 하며 수백명의 장정을 동원해 집터를 닦았다고 한다. 한편 오미리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왔따. 오미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 세 명당은 오미리 구만들에서 상,중,사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운조루가 상대인 금구몰니 명당이고, 행랑채 밖 못자리가 중대 금환락지, 면소재지에 있는 유부사가 세웠다는 돌탑자리가 하대 오보교취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운조루가 금구몰니의 명당에 해당한다고 하는 항간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유이주가 집터를 잡을 때 땅속에서 어린애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돌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둔 것이다.
 
운조루가 명당터라 하여 손꼽히지만, 기실 눈여겨보아지는 것은 운조루의 건축구성이다. 운조루의 옛모습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에서 살펴 볼수 있다. 1,000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드문 이집의 전체 건물구성은 -자형 행랑채(24칸), 사랑마당 T자형 사랑채(손님을 맞는 내사랑인 귀래정이 6칸, 주인이 거쳐하던 외사랑인 운조루가 16칸), 사랑 뒷마당, ᄆ자형 안채(36칸) 안마당, 부엌마당, 안사랑채, 안사랑마당(현재 소실), 사당(2칸), 사랑마당의 다섯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가도와 비교해보면 안사랑채와 행랑채가 없어졌으며, 집 앞에 연못이 조성돼 있었음을 알수 있따. 안채는 중문을 통하여 사랑채와 이어져 있다.
 
한편 운조루는 지리산의 좋은 나무만을 골라 가려서 지은 집답게 재목이 듬직하다. 사랑채 2칸은 가운데 기둥없이 지었는데, 이는 목재가 넉넉하지 않으면 감히 생각할수 없는 구조이다. 쪽마루도 통나무이고 딛고 올라서는 포석(鋪石) 조차 통나무로 하였다. 막돌을 비교적 차분하게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대청과 누마루를 두고 정남향한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기와지붕 너머로 안산격인 오봉산의 모습이 보이고 햇볕은 깊숙히 처마 밑으로 들어와 따사롭다. 사랑채와 대청과 누마루가 공존하는 것도 특이한데, (궁궐건축의 영향이라 볼수 있다) 공포와 같은 장식적 요소를 생략하여 소박한 멋을 잃지 않고 있다.
 
마당에서 높은 사랑채를 서쳐 안채로 통하는 길목은 수례가 올라가거나 짐을 지고 다닐 때 편리하도록 오르막길로 만들어져 있으며, 사랑채의 막돌 기단에 만든 계단과 비교되어 색다르다. 내원과 외원이라 하여 사랑채의 마당과 대문 밖의 입구쪽에 정원을 퍽 잘 꾸몄다고 하는데, 지금은 손길이 미치지 못하여 형편이 말이 아니다.
 
안채로 들어서면 네모 반듯한 마당 아랫쪽에 장독대가 있고, 거북을 닮은 맷돌이 있다. 큰 부엌자리에서 나왔다는 돌거북은 집안의 가보로서 대물림을 하고 있으나, 1987년 도둑맞아 이제 볼수 없다. 구만들 가운데에서 운조루의 앞뜰을 특히 '종자뜰'이라고 부르는데,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대문 앞을 흐르는 물은 왕시루봉에서 흘러내려온 덕은천이며, 종자뜰 가운데에 금가락지 형상의 대밭을 만들어 놓은 것도 풍수지리와 무관하지 않다. 건축물 구조와 이들 가문이 소장한 여러 문서, 서화 문구 등을 통해 조선후기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수나 관리가 소홀해 해가 다르게 쓸쓸해 지고 있다. 운조루 뒤편의 베틀봉에 자리잡은 거북형상의 산자락(왕시루봉에서 흘러내린 산줄기)에 집주인이었던 유이주의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선 동자석의 표정이 퍽 재미있다.
 
   
  0
3590
윗글 운조루의 뒤주
아래글 운조루 자료 정리 파일
-->
운조루 10대 정신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061-781-2644,
*이길순 (류홍수 어머니) : 010-8904-2644, *류정수 : 010-9177-7705연락처(클릭!)
*사이트 관리: 유종안 010-7223-1691 yujongan@daum.net
Copyright (c) 2008 운조루 http://unjoru.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