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내겐 오랜 친구 같은 사랑스런 누이가 있어요~~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누이~~’ 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도 모르게 발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다가 놀라 멈추었다.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뽕짝가락이 흥겨워 장단을 맞추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유행가를 처음으로 접하고 기억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무렵인 것 같다. 그 시절에 가장 인기가 있던 가수는 이미자 선생이었다. ‘열아홉 순정’,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등의 노래가 마치 국민가요처럼 불려졌었다. 그 때는 너무 어려 그냥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인가 보다 하고 동네 아이들과 소꼽장난를 하거나 공기놀이로 틈새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영어를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팝송을 배우게 된 것이다. 비틀즈의 '어제(Yesterday)’, 패티 페이지의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Try to remember)’, 스키터 데이비스의 '종말 같은 세상(The end of the world)’을 흥얼거리며 학교를 오갔고, 기독교계통 학교였기에 교내합창단원으로 발탁되어 성가(聖歌)를 부르며 사춘기를 보냈다. 소녀라면 누구나 그러겠지만 김소월 시집을 가슴에 품고 시구(詩句)를 읊조리면서.
고등학생이 되니 대학입시에 대한 압박감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공부하는 틈틈이 합창단 활동을 하였고, 오랜 훈련으로 제법 고음(高音)처리를 잘하게 되어 성악과를 지망하게 되었다. 음악의 기본 악기인 피아노를 배우고 학교 공부를 마치면 음악 선생님 댁에서 발성 연습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곡이나 이태리 가곡 등 클래식 분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관지에 문제가 생겨 하반기에는 진로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포크송과 발라드가 대세였다. 대학축제 때마다 통기타가 등장했고 양희은, 김문기, 송창식 등이 대중음악계를 장악하였으며 그것은 곧 대학문화가 되었다. 나도 역시 그 대열에 끼어 통기타를 구입하여 내 노래를 반주하며 낭만을 즐겼다. 친구와 듀엣을 만들어 축제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 음향 시설이 좋은 유명한 음악다방에 앉아 DJ에게 노래를 신청하여 감상하기도 했었다.
그 즈음 트로트계는 두 남자, 남진과 나훈아의 세상이었다. 1970년 무렵 서울 영등포에 구로공단이 설립되어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아가씨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조립하여 어려운 가계를 살리던 시절이었다.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며 ‘가요 톱텐’이라는 가요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이 두 사람은 늘 경쟁하게 되었고 1,2위를 다투었는데, 이들이 출연하면 그녀들은 단체로 몰려와 괴성을 지르고, 뛰어나와 꽃다발을 전하며, 심지어는 가수를 껴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들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한창 나의 지적(知的) 자만심이 하늘을 찌를 때인지라 그 모양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내 머릿속에 트로트는 혐오감으로 각인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트로트 가락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며 희한한 일이 생겼다. 직장에 다니며 사회를 배우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고, 세상과 부딪치며 인생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었다. 트로트의 노래 가사를 살펴보니 거기에는 절절하고 진한 인생철학이 들어 있었다. 곡조도 쉬워 따라 부르기도 편하고, 우리 민족의 한(恨)마저도 서려 있는 노래도 있었다. 그리 고급스런 표현들은 아니었지만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짓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들은 가요는 ‘댄서의 순정’이었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형편없이 수준이 낮은 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곱씹어 볼수록 이처럼 적나라하고 솔직한 표현이 있을 수 없었다. 직업이 댄서이니 춤을 추는 상대방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에는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배출되고 있어 그 발전이 자못 기대된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가요가 있지만 그래도 옛 가요가 더욱 정감이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트로트의 매력에 빠져 들고 있다.
차 안의 오디오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온다. ‘눈 녹인 산골짝에 꽃이 피누나~~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어느새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노래는 역시 트로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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