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정말 무더웠다. 기상관측 사상 최고로 더운 한 해였다.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오르고 잠 못 이루는 열대야가 한 달가량 지속 되었다. 날씨가 무덥고 환경이 복잡해지니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무기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형님은 서울의 병원에서 재검진을 하라고 하지, 큰아들은 진급관계로 고통스러워하지, 작은아들은 가장 더운 시기인 7월말부터 2주간 전주에서 연수가 있다며 며느리와 두 손자랑 함께 온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하필이면 왜 이런 말이 지금 떠오르는 것일까?
이스라엘 다윗왕이 반지 세공사를 불러 “날 위한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게 하며,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고 지시했었다. 이에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에 새겨 넣을 글귀를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에게 간곡히 도움을 청하니 솔로몬이 알려줬다는 그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인 것 같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작은아들 부부는 24개월짜리 상윤이와 10개월짜리 상온이를 데리고 왔다. 우리 부부만 살아 온 지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갑자기 가족이 늘어나니, 정신이 없다. 아침 일찍 아들을 출근시키고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손자들, 먹을 것 때문에 정신없는 아내, 그 많은 설거지, 빨래, 손자들 분유 먹이기, 목욕시키기, 놀아주기, 거기다가 무더위에 손자가 감기까지 걸려 병원에 가야하고, 병원에 가면 손자가 의사 선생님을 보는 순간, 병원을 들썩거리게 했다. 에어컨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더운 날씨여서 잠자리 문제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생활도 며칠 지나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손자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르고, 감기도 나아지고, 요령이 생겨 손자들의 재롱에 가끔 웃음이 나왔다.
'진급!' 말만 들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말이다.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는 시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문제가 아들 앞에 닥치니, 그 고통은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군에 있는 큰아들은 진급이 되지 않으면 전역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사십 대 초반에, 손자 손녀가 초등학생인데, 18년 군 생활에 열두 번의 이사를 하며, 평생직장으로 알고 그 힘든 생활을 견디어 왔는데…. 마지막 고비를 맞은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진급 발표가 8월 초에서 8월 중순으로 연기되어 날마다 고통이 배가 되니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경쟁자가 너무나 많아 진급 확률은 10%뿐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일까? 너무나 답답하여 생전 찾지 않은 절을 찾아가 기도도 해보고, 조상님도 찾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판가름이 나리라.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무더위도 입추와 말복이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열대야가 사라지고, 낮의 햇볕은 따갑지만 바람이 불어주니 한결 견딜 만 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두 달 간의 여름이 가니, 우리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 왔다.
부모님 같은 형님은 건강이 안 좋은지 5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젠 마음 편히 지내도 된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동안 서울까지 다니며 진료 받고, 치료 다니시느라 고생하신 형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정말 기뻤다. 작은아들 연수도 무사히 끝나고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이 떠날 땐, 힘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잘 못 해준 것이 없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정이 들어 손자들도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 눈물이 나왔다. 이런 것이 핏줄 때문이 아니던가?
큰아들 진급발표 날! 전날 걱정과 고민으로 밤을 새웠다. 오전에 발표한다고 했는데, 아무 소식도 없이 열 시가 지나고 열한 시가 지나더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가슴이 떨리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 진급을 기다릴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정말 시간이 너무너무 천천히 갔다. 한시가 지나고 두시가 넘었다. 전화기만 바라보니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두시 반이 지나 전화벨이 울렸다. 가슴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저 진급했어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도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큰며느리의 전화가 왔다.
“아버님, 진급했어요. 감사드려요. 부모님이 안 계셨으면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내가 한 게 뭐 있나? 그저 지켜만 봤지.”
모든 것이 다 감사했다. 큰며느리가 절에 가서 촛불을 켜놓고 백일기도도 하고 초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기도했다는 말이 생각나 가슴이 아렸다.
우리 집안에 행복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이제 큰아들이 50대 초반까지는 안심하고 군 생활을 이어갈 것 같아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낮에는 힘든 군 생활을 하며 밤에는 충주에서 그 먼 서울까지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를 한다. 또 열두 번의 이사를 하면서도 불평 없이 책임과 의무를 충실이 이행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리라. 지금처럼만 열심히 살아준다면 더 큰 꿈을 이루리라 기대한다.
지금은 누구나 살아가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경제가 침체하여 젊은이는 갈 곳이 없다. 취직하기가 정말 힘 든다. 모든 소상공인의 사업이 흔들리고 있고, 여기저기에서 먹고 살게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정부는 적폐청산, 미 투, 남북문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청년실업, 소상공인의 생존문제 등이 더 급하지 않은가? 내 아들 문제가 닥치니 정말 걱정이었다. 솔직히 아들이 진급되지 않으면 사회에 나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아들이 진급되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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